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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아바 Feb 28. 2020

출산 가방을 꾸리다.

35주 5일 (D-30) 

수능 이후 이렇게 특정 날짜를 손꼽아 기다린 적이 있었을까. 어느덧 길고 긴 임신이라는 여정의 끝이 슬슬 눈에 보이는 시점이 왔다. 한 달 후인 3월 28일 나는 그토록 기다렸던 출산을 예정하고 있다. 물론 출산 예정일에 아이가 바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시나리오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이가 거꾸로 있는 역아는 아니기 때문에 자연분만을 진행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빠르게 나오면 빠르게 나오는 대로, 늦게 나오면 늦게 나오는 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크면 큰 대로 걱정만 가득 쌓여가는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일단 준비하기로 했다. 이번 생엔 엄마가 처음인지라 각종 육아/출산 관련 유튜브를 열심히 탐독하며 드디어 '출산가방'이라는 것을 싸게 되었다. 출산 가방은 병원과 조리원에서 엄마와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준비하여 싸 두는 가방이다. 지진이나 화재가 발생했을 때 바로 들고 피난을 갈 수 있는 '재난가방'과 같은 역할을 하는 가방인 셈이다.

꼼꼼하게 기록된 출산 선배님들의 체크 리스트를 참조하여 하나 둘, 물건을 집어넣을 때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오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 정말 이제 애를 낳는구나. 갑자기 실감이 났다. 날마다 불러오는 배 모양과  허리의 통증은 어느새 만성질환처럼 다가왔고, 가끔씩 느껴지는 태동도 지인들의 카톡처럼 아가가 보내는 반가운 알람 같았다. 임신한 나의 몸은 일상처럼 익숙해졌지만 그 끝을 장식할 출산은 주위의 생경한 체험담 외에는 아직은 와닿지 않는 미지의 것이었다.


구부러지는 빨대, 사이즈가 넉넉한 슬리퍼, 도넛 방석, 립밤..., 옴짝달싹 못할 몸의 상태를 대비하는 준비물들을 하나씩 챙겨 넣으며 약 한 달 뒤 조우할 그날을 간접 경험하고 있다. 본래 천성이 게으른 편이지만 갑자기 출산을 해야할 때 아무 준비도 없이 허둥지둥 가방을 꾸리다가 무방비하게 병원으로 향하는 것만큼은 사양하고 싶기 때문에 바지런히 가방을 쌌다. 


작은 캐리어에 꾸역꾸역 짐을 밀어 넣고 지퍼를 야무지게 채워올렸을 때 출산을 위한 출사표를 던진 것처럼 사뭇 비장한 기분을 느꼈다. 한 달쯤 뒤 나는 아파오는 배를 움켜쥐고 익숙한 캐리어를 달달 끌고 병원을 향할 것이다. 요 몇 년 간 길고 짧은 여행에서 늘 나와 함께 했던 나의 정든 캐리어는 이제 새로운 여행길의 초입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현관문 한편에 오도카니 세워진 가방을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바람을 담는다. 

부디 덜 아프게 해 주세요. 

아기와 제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빨리 낳고, 빨리 회복하게 해 주세요.


출산과 엄마라는 미지의 세계로 던진 오늘의 출사표가 나를 무사히 이끌어주길 바란다.  한 달 후,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날, 부지런히 싸 두었던 캐리어를 끌고 돌아오는 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기를. 



덧. 가방을 준비할 때 '맘똑티비'라는 유튜브 채널의 출산가방 싸기 영상(https://youtu.be/nY2FN00hUtc)을 많이 참조했다. 영상 하단 고정 댓글에 체크리스트를 정리한 구글 드라이브 시트도 있어 물품별로 체크하기 편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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