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7~8층 규모 였는데 엘리베이터를 만들고 층마다 발코니가 있고 꼭대기 층에 독서실을 만들어서
학교 끝나고 교회에 가서 공부하다가 밤늦게 가도 안전하도록 해 주셨다. 다른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하교 후에 만나고 독서실에 맘놓고 공부하고 돌아 갈 수 있었다. 건설업에 종사하시는 장로님이 자신의 마지막 유작으로 그 교육관을 만드시고 돌아가셨다. 중학생에게도 그 어른의 마음은 전해졌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소그룹 별로 방을 하나씩 사용할 수 있었다. 냉난방이 동시에 가능한 라지에타식의(창가에 놓인 가늘고 기다란 몸체에서 찬바람과 더운 바람이 나오는)설비가 되어 있고 방마다 창문이 있고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서 마음껏 소그룹 모임을 하고 선생님에게 배웠다. 전학가는 나에게 공과공부 선생님이 선물해 주신 원목 보석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때 워낙 전학을 많이 다닌 덕에 마지막으로 전학 간 학교에서 5학년 닫임 선생님(김이겸선생님)이 마음 써 주셔서 잘 적응하고 졸업 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 그 지역을 떠나 다시 전학을 가야했지만 전학 간 당산서중에서 특별히 애정 표현을 많이 하는 소녀같은 닫임 선생님을 만났다.
고등학교 때는 1회라는 특별함으로 특별한 선생님들을 만났다. 교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고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다. 엄마가 없는 나에게 계란 말이 김밤을 주시기도 하고 노트로 상담을 이어가는 선생님도 계셨다. 야자 전에 저녁 시간에 데리고 나가서 서울대 안 식당에서 밥을 사주신 선생님도 있었다.
인생의 부분 부분마다 선생님들의 돌봄 가운데 보호 받았고 삶의 고민마다 의논할 대상들이 있었다. 물론 사기꾼도 만나고 가스라이팅하는 선배 어른들도 만났다. 그러나 다시 원래의 자리로 안전하게 올 수 있었던 안전지대들이 곁에 있었다.
최근에 30대 초반 들과 이야기 나눌 일이 있었다.
대학과 첫 직장을 경험한 그들은 공통적으로 그 첫 직장과 자신의 전공이 결국에는 자신과 안 맞았다는 것을 알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다음 직장을 위해 기술을 연마하고 인강을 듣고 백방으로 자신의 앞날을 준비하지만 불안감으로 살이 찌고 잠을 못자고 피곤했다. 알수 없는 분노로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좌절감을 가진 채로 해야할 것들을 위해 핏줄이 선 충혈된 눈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아....이 친구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친구들의 어려움과 특징들을 대화 가운데 나직히 이야기 하면서 대화는 깊이 들어갔다.
아이(30대 초반)들이 운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이 안타깝다.
처음 들어본다고 한다.
자신을 꿰뚫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해주고
괜찮다고 함께 애기들어주는 어른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이상하다...
수많은 선생님들 만났을 텐데...
20후반 30대들의 선생님들은 어디에 있는가...
세대차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예전에도 폭력 선생님 인격적 결함을 가진 촌지 선생님들을 차고 넘쳤었다.
나만 좋은 선생님을 만난 건가?
예전이 교육계는 더 문제가 많았고 자격 없이 쉽게 선생님이 된 선생님들이 많았었다.
작년에 코로나가 심해질 때 수업이 다 비대면으로 바뀔 때 한 대학교 교수님이 말씀하셨었다. 비대면의 인강이 아이들의 인간성에 매우 악영향을 미칠거라고 걱정 하셨다.
지금 20대는 더욱 심하겠지.....
필요한 정보만 검색해서 그 정보를 얻는 것으로 선생님을 대하며 인격적인 관계는 맺을 수 없을 때 20~30대는 다시 상담 선생님을 유투브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면서 나누는 이야기와 돈 내고 받는 상담이 같을 순 없다. 상담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이야기할 어느 저녁이 필요할 수 있다.
첫 번째 직업에서 실패한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지혜이다.
첫 번째 직장에서 실패한 그래서 전공도 잘못 선택한 것을 처음 안 그들에게 인생을 먼저 살면서 실패를 해 보고 극복한 경험이 있는 선배들의 애정어린 조언과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인생을 성공한 선배여서 나에게 마음을 연 것이 아니다.
나는 실패를 수 없이 한 사람이다.
나는 성공한 선배가 아니다.
귀 기울여 듣고 같이 고민하는 나의 태도를 느꼈기 때문에 마음을 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0대라고 문제가 없을까...정신이 자라지 못한 왜곡된 자의식을 가진 사람들 투성이다.
그림 작업실 8년 차로 말도 못하는 40대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30대들은 다르다.
이들은 세대적으로 전체가 다 아프다.
20대들도 아프겠지만 인생의 실패를 경험 중인 이들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누군가가 그랬다. 그들의 부모세대에 어려움이 있었다. 베이비붐 시대의 출생자들 현재 60대 중반들이 시대적으로 인구가 많아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대학진학도 직장도 힘들었다고 한다. 그들의 자녀들이 20대 후반 30대 초중반들이다. 부모의 burn out이 자녀들에게 지혜를 줄 수 없는 메마른 좌절감을 만들어 줬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20대말 30대들을 많이 만난 분의 통계니까
의미 있을 것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교회 선생님들은
왜 그들에게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 가르쳐줬나...
나는 혜택을 받고 자란 40대로 부채감을 느낀다.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다음 세대) 쏫아 부은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다. 받은 만큼 내려 보내줘야 한다.
예전의 40대와는 다르게 지금의 40대는 아직 가난하다.
나 역시 가난하다.
우리 부모님은 나보다 어린 나이 때에 훨씬 많은 돈을 버셨고 나를 키우셨다.
가난한 40대로서 20~30대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동네 약사님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플랫폼을 만들어 보라고 하신다. IT 강국에서 어떻게 플랫폼을 무시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청년사역을 오래 하신 목사님이 아이들(30대)을 심방하시겠다고 했다. 만나서 밥 먹고 차 마시고 시간과 돈을 투자 하지 않고 사람을 도울 수 없다.
책을 사주고 읽어보라고 도울 수 없다.
세미나를 만들고 세바시처럼 짧은 시간에 임팩트 있는 강연을 통해 구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깨달음은 줄 수 있지만 그 때 뿐이다.
삶을 같이 살아내고 시간을 꾸준히 투자하며 밥을 같이 먹는 시간들이 없이 사람은 구할 수 없다.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그 프로그램을 함께해서 성과를 내도록 해야하는가?
아....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을 돕는 일에 사명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년세대를 돕게 위해 조용히 준비하시는 어른들이 있다. 사명(使命) 목숨을 다해 지켜야 할 맡은 바 임무로 그들을 돕기로 하신 분들이 있다. 나는 어떻게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이제 부터 고민해 보고 사랑을 내려 보내 그들을 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