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함'이라는 가장 우아한 속도

by 동그라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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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함'이라는 가장 우아한 속도



오늘 아내와 집에서 차로 20분 정도 있는 횟집에 가서 만이천 원 점심 특선을 함께 먹었다.

많은 돈을 지불하면 훨씬 퀄리티 있는 근사한 식사가 가능하겠지만 아주 적당히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바로 옆자리에는 한 70대 정도로 보이시는 부부가 와서 마주 보고 앉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앉아서 식사하시는데, 식당을 둘러보니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이상에 가성비의 만족을 찾는 손님들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최선'이라는 단어에 중독되어 살아왔다. 20대에는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 30대와 40대에는 내 자리를 지키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늘 스스로를 한계 몰아붙이며 살아간다.

"더 많이, 더 높이"라는 구호 아래, 무리하는 것은 곧 성실함의 상징이었고,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포기나 패배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5060이라는 생의 고개를 넘어서며 비로소 깨닫게 된다. 인생은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아주 긴 산책이며, 끝까지 이 길을 즐겁게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폭발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지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힘'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한수희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란 에세이집을 읽었다.

한수희 작가가 말했듯, '무리하지 않는 선'을 찾는 것은 자기 비하나 나태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깊은 관찰과 존중이다. 내 몸의 관절이 보내는 신호, 내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부하,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는 최소한의 단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사람의 용기다.

젊은 날의 우리는 가지지 못한 것을 채우려 애썼지만, 이제는 내가 가진 것들 중 무엇을 남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만큼은 꼭 해내야 해"라는 강박적인 목표 대신, "오늘 하루 요만큼만 기분 좋게 해 보자"라는 유연한 목표의식이 필요하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한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과욕은 대개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이 나이쯤 되면 이 정도는 있어야지' 혹은 '남들은 저만큼 가는데'라는 비교가 우리를 무리하게 만든다. 하지만 50대 이후의 지혜는 그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면의 주파수를 맞추는 데 있다.

이제 50이란 숫자보다 60이란 숫자가 더 가까운 나이에 사실 남부러운 성과라고 내세울 건 별로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20대나 30대 때보다 하루하루가 덜 불안하고 더 만족스럽다.



모처럼 쉬는 날, 아침에는 근처 시립 도서관에 가서 책 세 권을 빌려왔다.

올해는 매 달 3권 이상 읽는 걸 일단 목표로 했는데, 1월에 이미 7권을 읽었으니 만족스럽다. 이제는 무리한 목표보다는 얼마든지 실현 가능하고, 그래서 달성하면 만족스러울 목표를 세운다.

도달하지 못할 높은 곳을 바라보며 자책하기보다는, 내가 도달할 만한 '적당한 언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가지려 한다. 거창한 성공이 아니더라도, 정갈하게 차려먹는 한 끼 식사, 매일 거르지 않는 짧은 산책, 오래된 책 한 권을 다시 읽는 시간처럼 작고 명확한 목표들이 삶을 더욱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



무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대충 산다는 뜻이 아니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내가 정말 아끼는 사람들과 나 자신의 평온을 위해 힘을 아껴두는 지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언젠가 끊어지기 마련이지만, 적당히 느슨한 줄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무리해서 얻은 화려한 훈장보다, 무리하지 않아서 얻은 깊은 숙면과 평화로운 아침에 더 감사하게 된다. 내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선'을 긋고 그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치열한 청춘을 지나온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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