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겐 좋았고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았다.

세 식구 태국 여행 이야기

by 피자치킨피치


방콕은 미식의 도시라는 감상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는데, 태국 음식이 입에 잘 맞는 건 어쩌면 나와 뭉미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치가 말했다. ‘아빠, 내일은 호텔 조식 먹으면 안 돼요?’ 그랬다. 온 혓바닥을 모두 자극하는 다채로운 향과 다양한 식감을 행복하게 즐겼던 건 사실 어른들뿐이었다. 기존에 익숙했던 음식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는 돼야 새로운 음식에 대한 갈망과 만족이 있게 마련이거늘. 피치에게는 화려한 맛의 향연보다 익숙한 과일과 한식, 미역국과 된장국에 쌀밥, 혹은 수프를 곁들인 잼 바른 빵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 호텔의 조식 평가가 그리 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 호텔 조식 뷔페를 예약했다. 뭉미는 어제 봐두었던 룸피니공원 아침 요가 교실을 간다. 조식 뷔페는 뭉미 없이 피치와 나 둘만 가기로 했다.


이름만 믿고 예약했던 반얀트리 호텔 조식 뷔페는 완전히 기대 이하였다. 음식 종류가 너무 적었고 있는 건 서양식 빵과 치즈, 소시지뿐이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방콕에 있는 호텔인데 그 흔한 쌀국수 코너도 없다는 것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피치는 반대였다. 수박과 빵만 가져다 먹었을 뿐인데도 황홀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 땀 흘리지 않아도 되는 시원하고 청결하며 쾌적한 실내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피치에게는 음식의 다채로움과 태국 전통음식의 유무보다 익숙한 음식 하나하나의 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신난 피치는 아빠의 도움 없이 혼자서 음식을 가져오고 눈을 가리고 무슨 음식인지 알아맞히는 흑백 요리사 놀이를 만들며 아침 식사를 행복하게 즐겼다. 내게 좋았던 식당은 피치에게는 좋지 않았고 피치가 행복하게 즐긴 식당은 내겐 별로였다.

문득 피치의 성장을 새삼 느낀다. 그동안 나는 피치를 내 손안에 쏙 쥐고 내 뜻대로만 행동하길 바라왔다. 아빠 엄마 말씀을 잘 들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고 그래야 훌륭하고 현명한 어린이라고. 그런데 요즘 들어 견고했던 그 방식에 점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그 틈으로는 집요하게 조언을 빙자한 화와 잔소리를 쏙쏙 박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다 할 예고도 없이, 이렇게 반얀트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식당을 피치도 좋아해야 하나? 피치의 취향까지 내 뜻대로여야 하는가? 내가 틀렸다. 피치도 이제 어엿한 초등학생이다. 생각의 빈자리를 점점 자기의 방식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내 생각과 기대를 피치에게 억지로 주입하기보다는 피치가 혼자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것이 내가 가져야 할 역할이요 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피치에게 오늘 아침 식사는 정말 최고였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오늘은 방콕을 떠나 꼬따오로 떠나는 날이다. 그동안 구석구석 정든 숙소를 정리했다. 호텔을 예약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이 바로 위치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역 바로 앞이면 가격이 훌쩍 올랐고, 역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저렴해졌다. 우리는 BTS, MRT 역에서 도보 15분 정도 걸리는 이 호텔로 적당히 타협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기대하지 않았던 호텔 셔틀 서비스가 있어서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도심 전망의 인피니티 풀을 갖춘 수영장은 오기 전부터 많이 기대했으나 사실 바로 앞 공사장이 너무 크게 보여 전망이 아쉬웠고 뿌옇고 탁한 수질도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걱정했던 120cm의 수영장 깊이는 오히려 피치에게 적당한 도전 정신을 주었고 결국은 몇십 분 만에 깊은 물에서 호흡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 주었다. 일반 객실이 아닌 주방과 세탁기가 딸린 방을 이용한 점도 좋았다. 하루 종일 돌아가던 건조기 겸용 세탁기 덕분에 우리는 방콕에 5일이나 머물면서도 캐리어에 향기 나는 깨끗한 옷만을 담아갈 수 있었다.


레이트 체크 아웃을 하고 방콕에서의 마지막 저녁 식사를 했다. 첫끼를 골목 식탁에서 즐겼으니 마지막도 골목에서 먹자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자리는 만석이었고 대기하는 줄까지 있어서 포기했다. 그런데 급한 대로 대신 들어간 식당이 또 대박이었다. 카오 소이라는 곳인데 식당 안에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우리가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줄까지 길게 섰다. 주 메뉴는 카오 소이라는 태국식 커리 요리이다. 굉장히 향이 강하고 매콤함도 강렬하게 느껴지는 게 인도 커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식탁 위에 밀봉된 채 놓여있는 돼지 껍질 튀김을 카레에 토핑처럼 넣어 먹을 수도 있는데 완전 별미였다.


해가 떨어지고 택시를 불러 탔다. 목적지는 방콕 북서부의 롬프라야 버스 승차장. 방콕 퇴근 시간의 미친 정체 때문인지 10km 남짓 떨어진 거리를 가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가다 서다 거북이걸음을 반복하는 차에서 지칠 대로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차에서 내리자 펼쳐진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무실 앞이 버스 탑승 수속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캐리어를 몽땅 챙겨 줄을 찾아 서고 뭉미는 피치와 사무실 안쪽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척척 움직이는 우리가 제법 베테랑 같다. 줄은 길었지만 빠르게 줄어들었고 내 뒤에도 제법 많은 줄이 생겼다. 한참 만에 버스 탑승 수속을 끝내고 가슴팍에 목적지와 버스 좌석 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였다.


버스는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순서대로 좌석을 배정했는지 우리 자리는 맨 앞이었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1-2 우등버스의 좌석은 넓고 편안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거 푹 자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잠시, 거짓말처럼 무섭게 잠이 들었다. 동틀 무렵 춤폰에 도착하면 다시 배를 타고 꼬따오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