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족 태국 여행 이야기
조금 늦잠을 잤다. 어제 아침 8시쯤에 꼬따오에 도착했으니 이제 막 꼬따오에 도착한 지 24시간, 만 하루가 지났다. 여기 숙소의 아침은 세미 뷔페식인데 메인 메뉴를 하나 골라 주문하고, 나머지 과일과 음료, 시리얼 등의 간단한 음식은 뷔페식으로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우리 셋은 각각 태국식 죽, 쌀국수, 서양식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다양하게 먹고 싶었다기보다는 어느 하나라도 피치의 입맛에 맞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피치는 셋 다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는 테라스석은 해변과 바로 이어져 있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서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행복해졌다. 반들반들하게 잘 관리한 나무 마룻바닥을 맨발로 밟는 감촉이 특히 좋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백사장에서 날아온 자글자글한 모래가 반들반들한 바닥에 묻어났는데 그 때마다 직원이 부리나케 빗자루질을 했다. 정작 서빙은 여유롭게 하던 느긋한 직원은 식탁 정리의 소임보다 마룻바닥을 쓸 때 더 정성을 다했다.
부모 속도 모르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피치와 친구는 모래놀이와 바닷물에 발 담그기 놀이를 즐기기에 한창이었다. 어제 본 송아지만 한 개가 아니라 팔뚝만 한 작은 강아지가 바다에서 놀자 그 뒤를 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출근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면 날카로운 식사 명령을 쏘아붙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나도 뭉미도 덩달아 여유가 넘쳤다. 밥을 조금 천천히 먹으면 어떤가. 또 부족하게 먹으면 또 어떤가. 아니, 밥보다 여기 모래와 바다를 즐기는 게 더 훌륭한 자세가 아닌가.
느긋한 아침을 즐기고 스쿠터에 짐을 꾸역꾸역 밀어 넣어 채비를 단단히 하고는 아오륵(Ao Leuk) 비치로 향했다. 가는 길이 순탄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리 능숙하지도 않은 스쿠터 운전 솜씨로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가 심한 길을 달리는 것이 여간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 손에 뭉미와 피치의 안전까지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나까지 겁난 티를 내면 안 되기에 짐짓 여유로운 척 콧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바로 이것이 가장(가족 중에 유일하게 스쿠터를 탈 수 있는 자격자)의 무게감인가.
아오륵 비치는 과연 고난을 뚫고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우선 꼬따오 섬에 모인 사람 중 절반은 여기에 와 있는 듯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 스노클 마스크를 쓰고는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모래사장의 열기가 너무 심해서인지 바닷물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에어컨 없는 물 밖에서 선풍기에 의존하며 버티기보다는 시원한 바닷속이 훨씬 더 쾌적했다. 같은 섬인데도 숙소 앞 수중 환경과는 풍경이 완전히 달랐다. 살아 있는 산호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얕은 물과 깊은 물이 지척에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보이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크고 작고 밝고 어둡고 형형색색인 물고기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피치는 상어를 보고 싶어 했다. 거대한 식인 상어 말고, 지느러미에 노란 무늬가 있는 팔뚝만 한 상어 말이다. 실제로 아오륵에서 상어를 봤다는 후기가 많아서 내심 기대했건만 아쉽게도 만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스노클링을 마치고 엄마들과 백사장에서 시간을 보낼 때 아빠들은 상어와 거북이를 찾아 조금 더 깊은 물로 헤엄쳐 가보기로 했다. 목표는 섬 곳곳에서 다이버를 가득 데려온 배가 닻을 내린 곳, 고인물들이 노는 곳이니 좋은 것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가벼운 스노클 장비만 갖추고 있어서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보진 못했지만, 물 위에 둥둥 뜬 채 바닥을 헤엄치는 다이버들과 커다란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입안이 소금으로 가득 차서 혀가 염장되는 게 아닐까 싶을 때쯤 바다에서 나왔는데 나중에 따져보니 놀랍게도 스노클링만 무려 두 시간을 즐겼다.
주린 배를 채우고 체력도 회복할 겸 근처 음식점으로 향했다. 한적한 해변 앞에 자리한 식당 Koppee bar는 내부에 작은 수영장이 있었다.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던 패스트푸드를 허겁지겁 위장으로 밀어 넣고 수영장에서 또 물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까 스노클링 후 물기만 가볍게 닦아내고 셔츠만 걸치고 이동한 거라 그대로 다시 셔츠만 벗어두고 물에 풍덩 빠지면 되었다.
수영복 위에 셔츠 한 장, 여기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이렇게 다닌다. 매일 이런 날씨 속에서 산다면 옷은 위아래 딱 다섯 벌 정도만 있어도 되겠다. 소비도 줄겠다. 온 가족 옷장은 작은 것 하나면 충분하겠고 빨래도 더 적게 할 것이며 가사 노동에 쏟는 시간도 훨씬 더 적을 것이다. 아하, 여기 사람들의 여유로움은 천성이나 민족성이라기보다는 날씨 때문인 것이다.
손가락 끝이 자글자글해지고 몸이 퉁퉁 불겠다 싶을 때쯤 꼬따오 최고의 번화가인 사이리 비치로 자리를 옮겼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백사장에는 크고 작은 리조트와 카페테리아가 줄지어 있었고 일몰을 만끽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꼬따오 오기 전에 즐겨 보던 TV쇼, 팽봉팽봉 촬영지도 바로 사이리 비치에 있었다.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적당한 카페테리아를 찾아 앉았다. 백사장 위 빈백에 앉아 떨어지는 해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물론 아이들은 아찔하게 아름다운 일몰을 가만히 앉아서 눈에 담기보다는 온 바다와 한 몸이 되는 것을 택했다. 그래, 놀아라. 마음껏 바다를 즐겨라.
생각해 보면 해외여행을 다른 가족과 함께한다는 게 내게는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로서는 함께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천적으로 내향적인 성격에다 후천적으로 갖게 된 직업병까지 한술 보태어 생긴 나의 별로 자랑스러울 것 없는, 다소 까탈스러운 특성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다르다. 피치의 어린이집 친구네 가족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벌써 햇수로 5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뜻이 맞아 함께 캠핑을 다닌 횟수가 두 손 열 손가락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이고, 같이 밥 먹고 술잔을 기울인 건 두 손 두 발을 다 꼽아도 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혈육을 제외하고 안심하고 피치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반대로 나도 기꺼이 피치 친구를 돌봐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피치와 친구가 다툼 없이 정말 행복하게 잘 지낸다는 것이 가장 좋은 점이다. 다른 가족과 함께 하는 생애 첫 해외여행, 꼬따오의 시간은 방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술이 그렇다. 아오륵 비치 - 코피바 - 사이리비치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한 어른들의 작은 파티는 위스키 - 하이볼로 이어지며 종국에는 가지고 있던 술을 거덜내버리고 말았다. 인사불성이 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방콕에 있는 5일 동안 겨우 맥주 2~3잔 만을 마셨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마시는 술의 양이 엄청나게 늘었다.
내일은 어떤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 가족만의 여행이었다면 비행기를 타기 전에 이미 모든 일정을 짜뒀을 거다. 하지만 계획 없이 되는 대로 여행을 즐기는 친구네 가족의 철학에 기분 좋게 응했다. 이것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