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족 태국 여행 이야기
어젯밤 과음의 여파가 생각보다 심하게 남았다. 보통 세 식구 중에 내가 가장 먼저 일어나는데 오늘은 뭉미와 피치가 일어나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겨우 눈을 떴다. 아침 식사 시간이 마감되기 전에 얼른 한술 뜨러 식당으로 갔다. 입맛이 하나도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쏙(태국식 죽)을 주문해 몇 술 뜨는데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겠다는 아이들을 뭉미에게 부탁하고 나는 오전 내내 잠만 잤다. 숙취 때문만은 아니었다…라고 믿고 싶다. 지난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하느라 부족했던 잠을 이때다 싶어 내리 몰아 잔 것이다. 밖은 비가 무섭게 내리고 있었다. 태국에 와서 처음 만나는 강한 비였다. 특별한 일정 소화를 못하고 잠만 자야 했던 내게는 다행이었다. 자칫 내게 향할 수도 있었던 일행들의 원망의 화살을 날씨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
내가 죽은 듯 잠을 자는 사이, 친구네 부부가 잠시 그친 비를 뚫고 나들이를 다녀왔다. 괜찮은 가게를 찾아 마사지를 시원하게 받고 왔다는 친구의 손에는 쏨땀 맛집에서 포장해 온 점심거리가 들려있었다. 아이들은 방 안 책상에서 나란히, 어른 넷은 발코니 탁자 위에 음식을 차려놓고 빙 둘러섰다.
식욕이 없어 마지못해 들었던 젓가락은 이내 신들린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태국 와서 처음 먹어본 쏨땀 때문이다. 파파야의 사각거림과 적당한 간, 살짝 치고 올라오는 매콤한 맛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우러졌다. 쏨땀 양념에 면도 비비고 밥도 말아가며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다. 이 마성의 쏨땀은 집 나갔던 식욕을 되찾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꼬따오에서 지낸 지 벌써 삼일 째, 우리는 여기를 태국의 전라도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나라 남도 음식이 맛있듯 꼬따오에서 먹은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기 때문이다. 아, 정정한다. 하나는 빼야겠다. 첫날 첫 끼에 먹었던 분홍빛 팟타이는 다시 생각해도 좀 아니었다.
해는 중천을 넘겨 기울기 시작했지만 컨디션 회복에 전념했던 나는 이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얼른 마사지받고 오라는 친구네 부부의 제안을 못 이기는 척 수락했다. 친구와 놀겠다는 피치를 숙소에 두고 뭉미와 단둘이 나들이 길에 나섰다. 낯선 땅에서 뭉미와 단둘이 데이트라니, 컨디션은 회복을 넘어 정점을 찍었다. 추천받은 마사지 가게에서 시원하게 몸을 풀고, 항구 주변 기념품 가게도 야무지게 구경하고 돌아왔다.
오늘을 휴식의 날로 선포하기로 모두가 입을 모았다. 그대로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피치의 삼국지 1,2권을 몰아 읽었다. 아빠로서 딸은 만화책보다 줄글을 읽길 바랐는데 그러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재밌으니 안 읽을 수 있나. 책을 읽다 잠시 오늘을 돌아봤다. 아픈 와중에 마사지도 받고 소소한 쇼핑도 즐겼다. 그럼 됐다. 원래 여행을 오면 하루하루 시간을 아껴 쓰느라 잠을 줄이는 게 당연했었다. 과음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쉬었으니 백해무익까지는 아닌 셈이다. 푹 쉬었으니 정말 됐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완전한 회복의 신호탄이다.
점심 식사에 이어 저녁 식사도 쏨땀을 먹기로 했다. 포장도 맛있었는데 직접 가서 먹으면 얼마나 더 맛있을까! 기대를 잔뜩 품은 채 식당으로 향하는 길, 예상치 못했던 황금빛 일몰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센 비를 쏟아내던 하늘은 품었던 수분을 거의 다 짜낸 듯 푸른 하늘을 드러냈다. 햇빛은 너무 강해 눈을 가늘게 뜨고 봐야 앞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해가 수평선에 가까워질수록 해변 모래의 그림자는 깊어졌다. 사진가들이 이 시간을 왜 ‘매직 아워’라 부르는지 온몸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초마다 색과 형태, 심지어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까지 급박하게 변하는 통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가 우연히 마주친 감동적인 낙조를 뒤로 하고 폼 쏨땀 가게에 도착했다. 대충 잡아도 예닐곱 명의 직원들이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고 나르느라 바빴다. 널찍한 가게 내부는 이미 만석이었고 우리 앞에 기다리는 손님들도 몇 팀 있었다. 나이도 성별도 피부색도 달랐지만 여기 모인 모두는 여기 쏨땀에 매료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도 질세라 쏨땀을 메인으로 똠얌과 카오팟(볶음밥), 망고 스티키 라이스, 그리고 코코넛까지 행복한 마음으로 비웠다.
내일은 꼬따오 북서쪽의 두짓 분차로 숙소를 옮기는 날이다. 3박이면 적당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아쉬웠다. 정들만하면 떠나는 느낌이랄까. 하루나 이틀 정도는 더 있어도 좋았을 뻔했다. 참, 매번 글 아래 남겼던 영상 일기 분량이 오늘은 평소의 절반 밖에 안된다. ‘과음을 견제하자‘로 다소 어설프게 글을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