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 발리 여행기
정글 속 낙원, 정든 악사리 리조트를 떠나 새로운 숙소로 옮기는 날이다. 이 타이밍에는 픽업과 샌딩이 포함된 투어를 하나 끼우면 좋다. 첫째, 숙소 간 이동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 어차피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짐 보관과 이동이 간편하다. 투어 차량 트렁크에 우리 짐을 계속 싣고 다니므로 안심할 수 있다. 교통비와 짐 보관료를 줄일 수 있으니 일거양득인 셈이다.
발리의 여러 투어 중 우리가 선택한 것은 바로 ‘바투르 산 일몰 투어‘이다. ‘숙소 픽업 - 카페 - 블랙 라바(용암 지대) - 바투르 산 중턱 일몰 감상 - 새 숙소 샌딩’으로 이동 거리가 제법 길어 점심쯤 시작해서 늦은 밤에 끝난다. 원래는 카페를 가기 전에 커피 농장을 한 군데 들르기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뺐다. 차는 아주 깨끗했고, 기사님도 매우 친절했다.
우붓에서 한 시간 반을 달려 첫 번째 코스인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이름은 아카사 AKASA 카페인데 아카사는 인도네시아어로 ‘하늘, 우주’를 뜻한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바투르 산의 어마어마한 풍경에 우와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봉우리 하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완만하게 내려오는 전형적인 화산의 모습이 무척 생소했다.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화산이고, 최근 분화는 지난 2,000년에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근처에 경작지와 작은 농막 같은 가건물이 몇 있을 뿐, 본격적인 건축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흔적 없는 검은색 화성암과 억척스럽게 자라나는 초록빛 식물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더라.
카페는 산을 마주하고 가로로 길게 뻗은 구조이고 도로 쪽으로는 유리문과 창문이, 산 쪽으로는 창문 없이 뻥 뚫려있었다. 안전장치로 투명한 유리 벽을 골반 높이까지 세워두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영 불안해서 우리는 끝에서 크게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만 긴장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개중에는 겁도 없이 유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상상이 되어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여기는 분명 우리나라였다면 안전장치 미흡으로 준공허가가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킨타마니 kintamani 지역은 커피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카페에서 주문할 수 있는 커피의 종류가 엄청 다양했다. 그중 V60 핸드드립이 보이길래 뭉미랑 나랑 하나씩 주문했다. 메뉴 이름은 Kintar(natural process), Sandikala(wine process)이고, 가격은 각각 39k로 다른 커피보다 살짝 비쌌다. 그래도 우리나라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보다는 훨씬 더 저렴하다. 발리 물가 만세! 간식으로는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피치가 좋아하는 초콜릿 빵과, 처음 보는 (문제의)쁘얌 PEYEM을 주문했다.
멋진 풍경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말끔하게 차려입은 한 할머니께서 인사를 건넸다. 발리 북서부에서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오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셨다. 기회가 된다면 본인의 동네에도 놀러 오길 권하셨다. 여행자들에게 별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러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서툰 영어지만 더듬더듬 할머니와 이야기 꽃을 피우는데… 제법 시간이 오래 지났지만 우리가 주문한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직원을 불러 말을 해봐도 핸드드립이라 늦는다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렇게 한 30여 분을 기다렸을까, 드디어 커피를 시작으로 음식이 나왔다.
커피 맛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특히 Sandikala는 인위적이지 않은 과실 향의 풍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큼직한 유리 항아리에 커피가 담겨있고, 이를 독특하게 설계된 유리잔에 조금씩 따라 마신다. 잔은 바닥 중앙이 돌출되어 있어서 똑바로 세울 수가 없는 구조인데, 상단 모서리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 향이 사방으로 퍼진다. 처음 보는 방식인데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따르고, 돌리고, 향을 즐기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이 하나하나 너무 재미있었다. 함께 나온 시원한 물도 상큼한 잎사귀가 한 장 담겨있어서 입을 깔끔하게 헹구기에 좋았다. 언젠가 내가 카페를 운영하게 된다면 참고할만한 방식이다.
커피에 이어 초콜릿 빵도 그럭저럭 맛있게 먹었는데, 가장 나중에 등장한 쁘얌은 그 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너무 오래 익혀서 다 녹아내린 고구마 같아 보이기도 하고, 밀도 높게 뻑뻑한 감자죽 같기도 했다. 냄새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용기 내어 한 술을 뜨는데 ‘읍!’ 뭔가 시큼하고 속이 확 안 좋아지는 맛이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가리는 음식이 전혀 없고 고수, 민초, 찍먹, 부먹 다 기꺼이 품을 줄 아는 사람인데, 이건 분명히 음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옆의 발리인 할머니에게도 이거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려 봤는데 소통의 문제로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직원을 호출했다. 이거 이상하다고 말을 하니 어쩌고 저쩌고… 소통은 잘 되지 않았다. 살짝 기분이 상할 것 같을 찰나, 직원은 계산서를 다시 가져왔다. 늦게 나온 커피 두 잔과 쁘얌 값을 뺀 가격이 적혀있었다. 그전까지는 이 사기꾼 같은 놈들이 어디서 음식으로 장난을 치나 싶었는데, 그 계산서를 보는 순간 화가 눈 녹듯 녹아내렸다. 갑자기 내가 어글리 코리안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음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먹을 줄 모르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남들보다 상당히 늦게 나온 것은 사실이니까 사장님의 호의는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쁘얌은 싱콩(카사바)을 발효시킨 인도네시아의 전통 음식이었다. 발효 음식이니 그런 냄새가 나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 비유하자면 굳이 삭힌 홍어를 주문해서는 이상한 맛이라고 항의하는 외국인의 모습이었을까.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한 내 무지 때문에 발생한 부끄러운 해프닝이었다. 다음에 도전할 기회가 생긴다면 다시 한번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해보고 싶다.
다시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렸다. 엄청 커다란 투계를 기르는 어느 가정집에 도착해서는 쨍한 노란색 오프로드 지프차로 갈아탔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구경한 싸움닭의 위용에 조금 놀랐다. 4인승 지프는 제법 오래되어 보였지만 그래도 정성껏 관리한 티가 났다. 꼬불꼬불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 첫 번째 포인트인 블랙 라바 지역에 도착했다.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새까만 현무암이 다양한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고 놀라운 생명력의 크고 작은 풀과 나무들이 돌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나와 자라고 있었다. 남는 건 사진뿐, 기사님은 특정 포인트에서 특정 포즈를 기계처럼 요구했고, ‘웃어, 하나, 둘, 셋’ 등 사진 촬영에 필요한 실전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우리뿐 아니라 여기저기 형형색색의 지프차로 실어 온 관광객들은 다들 비슷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투어의 핵심인 일몰 포인트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울퉁불퉁한 진짜 흙길과 돌길을 힘겹게 올랐다.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날 때면, 이게 진짜 가능한 건가 싶을 정도로 좁은 길에서 묘기를 부리듯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30여 분, 드디어 일몰 포인트에 도착했다. 하늘이 잔뜩 흐렸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다양한 포즈로 찍고 싶은 사진을 마음껏 찍고, 셋이 나란히 지프 지붕에 걸터앉아 서서히 붉어지고 있는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마침 기사님이 무심코 찍어준 1분 내외의 영상이 또 예술이었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다 구글 기준 예상 일몰까지는 20여 분이 남았고, 멋진 일몰은 이게 전부일 것 같아서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기사님은 예상보다 빨리 끝나게 되니 내심 이게 무슨 횡재냐 싶은 표정을 지음과 동시에, 진짜 지금 내려가도 괜찮겠냐고 몇 번을 되물었다. ‘Of course, of course’ 내려가는 차는 우리 밖에 없었는데, 올라오는 차는 엄청 많았다. 반대편 차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며 신나게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오프로드를 다 내려와 시골 마을길을 지날 무렵, 하늘이 너무너무 멋지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15분, 아니 10분만 일몰 포인트에서 더 기다렸다면 하늘을 더 멋지게 감상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아쉬움도 잠시, 이 모든 것이 다 즐거웠다. 그래, 우기 한복판에서 모든 날씨 앱들이 입을 모아 비 소식을 외칠 때, 운 좋게 비 한 방울 안 맞은 게 어디냐. 비록 내려와서지만 잔뜩 흐린 하늘이 열리고 마법 같이 찬란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우리 가족 세 식구가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다음 숙소는 다시 우붓 시내, 카자네 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