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병원에? 그러나 La dolce vita

우리 가족 발리 여행기

by 피자치킨피치

바투르 산 투어의 피로를 안고 새 숙소 카자네 무아에 도착한 건 저녁 8시 반이었다. 그래도 이튿날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일반 객실을 리모델링하여 만든 헬스장은 조금 낡았어도 제법 성능 좋은 트레드밀이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조식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특히 달걀 코너에서 주문해서 받아먹는 에그 베네딕트는 두 번 시켜 먹었을 정도로 정말 입맛에 딱 맞았다.


호텔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호텔 부지 내 좁은 산책로를 따라 걷다 원숭이를 만났다. 첫날 몽키 포레스트 주변에서 느긋하게 걸어 다니던 원숭이와 달리 이번 원숭이는 한 손으로 새끼를 안고 나무 사이사이를 다른 한 손으로 잡아채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우붓에서 원숭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고양이처럼 자주 볼 수 있는 동물이긴 한데, 그래도 한참 동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 그랬다. 아무튼 발리에서 몇 날 며칠을 더 있어도 원숭이는 마냥 신기하게 다가올 것만 같다. 정말이지 절대 질릴 수 없는 풍경이다.


산책을 마치고 수영장에 갔다. 여기 수영장은 오전 내내 그늘이다. 덕분에 따가운 햇빛에 등껍질 벗겨질 걱정 없이 놀 수 있었다. 깊이는 1.5m 절반, 3m 절반으로 완만하지 않고 갑자기 깊어지는 부분이 있다. 3m 바닥을 찍어보고 싶은 마음에 잠수를 시도했는데 귀가 아파 그만두었다. 문득 몇 해 전 다이빙 스쿨에서 기초를 배웠던 기억이 났다. 그때 내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포기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퀄라이징 실패 때문이었다. 아무리 코를 막고 침을 삼키고 귀에 바람을 넣어도 귀 속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땐 실패했지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이빙은 꼭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스포츠이다.


점심을 먹으러 시내로 나갔다. 호텔에서 시내 어디든 무료로 픽업-드롭해 주는 서비스가 있어서 정말 잘 활용했다. 셔틀 덕에 무더운 날씨 속에서 나와 뭉미, 그리고 무엇보다 피치의 고생을 덜어줄 수 있어서 좋았다. 왕궁 근처에 내려 기념품을 구경하며 걷다가 우연히 sun sun warung이라는 유명 나시 짬뿌르 가게를 발견했다. 사장님이 환하게 웃는 얼굴이 문 앞에 풀컬러로 인쇄되어 있어 눈에 띄었다. 자신의 얼굴을 대문짝만 하게 넣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음식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일 수 있겠다. 우리나라 설악 추어탕이 떠올랐다. 사장님의 무표정한 얼굴을 간판에 큼직하게 넣은.


나시 짬뿌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백반 같은 음식이다. 찐 쌀밥과 각종 반찬들이 한 쟁반에 함께 담겨 나온다. 슴슴한 샐러드와 구워낸 닭꼬치 두 개, 향신료에 볶은 닭다리살, 짭짤하게 조린 달걀 반 쪽, 옥수수알을 하나하나 떼어내 튀김옷을 입혀 튀긴 요리와 짭짤한 소스까지, 아주 푸짐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피치는 가게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고양이와 개를 흥미롭게 관찰하느라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즐겁게 시내 구경을 하는데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마침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다른 카페와 달리 스타벅스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는데 그 이유는 여기만큼 에어컨을 잘 틀어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에어컨 없이 선풍기만 사용했다. 건물 구조가 한쪽 또는 두 쪽 방향으로 벽 없이 기둥만 있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자리를 잡아 앉고 다음 목적지를 고민했다. 마침 창 밖 건너편으로 스파 가게가 보였다. 할까 말까 망설이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바로 헤어 브레이딩, 머리 땋기다.


콘로우는 머리를 땋는 방식 중 하나이다. 땋은 모습이 마치 옥수수같이 생겨서 ‘corn row’라 부르게 되었단다. ‘발리에 가면 머리를 한 번 땋아보리라.’ 막연한 꿈을 품고 그동안 불편함을 감수하며 머리를 길러 오지 않았던가. 두근대는 가슴을 누르며 가격 흥정에 나섰다. 그동안 캡처해 둔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여주며 ’How much is it for hair braids?’라 묻자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No, we can’t.’ 내 머리 길이가 땋기엔 턱없이 부족하단다. 아아, 아쉬워라. 대신 피치가 눈을 빛내며 자기가 머리를 땋겠다고 했다. 그래 너라도 대신해줘서 고맙다. 피치는 보라색 색실을 섞어 양쪽 각 두 줄씩, 총 네 줄을 땋았고, 그동안 나와 뭉미는 시원하게 마사지를 받았다.


숙소에 돌아와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데 다리가 간지러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리 중에서도 오금 일대가 빨갛고 오돌토돌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도저히 긁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심하게 가려웠다. 집에서부터 챙겨 온 벌레 물린데 바르는 약도 발라보고 찬물에 씻어도 봤지만 증상은 가라앉지 않았다. 줄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뭉미는 내 오금을 보자 소리를 지르며 ‘이건 배드버그에 물린 증상이야!‘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름이 쫙 끼친 나는 얼른 침대를 찬찬히 살피며 빈대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 꽤 오랫동안 집중하며 찾아도 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침대 곳곳에 친환경 살충제를 뿌렸다.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우붓 시내에는 크고 작은 병원들이 많이 있었다. ‘medical doctor’라고 적힌 간판만 보고 들어갔기 때문에 공식 병원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집을 개조한 것 같은 모습이었고,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환자는 나밖에 없었다. 간호사 한 분이 영어로 접수를 해줬다. 10분만 기다리면 의사 선생님이 온다고 했다. 병원이 가까워서 다행이라는 마음 반, 여기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 반으로 기다린 지 몇 분. 10분이 10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은색 금속테 안경을 쓴 의사 선생님은 엄청나게 친절하고 자상한 태도로 날 안심시켰다. 돋보기로 환부를 들여다보고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베드버그는 아니고 알레르기 반응이며, 아마 마사지 오일에 자극받은 것 같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별의별 생각을 다 했었다. 빈대 때문에 생긴 상처라면 호텔에 보상을 요구해야 하나, 당장 오늘 밤은 어디에서 어떻게 자야 하나, 나는 그렇다 치고 피치와 뭉미는 어떻게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은 이제 끝, 안심해도 된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 자세한 진찰과 처방, 온화하고 자애로운 태도는 한국에서도 절대 느껴보지 못했던 경험이다. 아니나 다를까, 청구된 진료비는 우리나라 돈으로 8만 원이었다. 그렇다, 그 친절은 바로 철저한 자본주의식 친절이었던 것이다. 발리 오기 전 여행자보험을 들어두길 정말 잘했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배가 고프다는 걸 느꼈다. 피자가 먹고 싶다는 피치의 의견에 따라 저녁 식사는 이탈리안으로 정했다. 호텔 버기를 타고 Pizzeria Monello라는 식당에 갔다. 화덕에 구운 기가 막힌 프로슈또 루꼴라 피자와, 살이 통통하게 오른 해산물로 가득 찬 봉골레 파스타, 꾸덕한 버섯 리조또를 맛있게 먹으며 우붓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식당 한 켠에 큼지막하게 적힌 문구가 눈에 띈다. La dolce vita. 그래, 이것이야말로 정말 달콤한 인생이 아닌가! 내일은 길리 섬으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