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영 Oct 27. 2024

페이스 메이커

방학이 되고 동네 수영장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한 달 후 열리는 교육감배 중학생 수영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전문체육 선수가 아닌 비등록 선수들과의 경쟁이었지만, 다른 이들보다 수영을 늦게 시작했고 나의 첫 대회였기에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물에서 제대로 떠본 적이 없던 나는 뒤늦게 작년 여름 방학에 수영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매일 오전 6시. 연습에 집중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시간이었다. 각종 강습이며 자유 수영 인파가 8시만 되어도 몰려들기 시작해 샤워실이나 탈의실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자유롭게 속도를 낼 수 없이 금세 가로막히기 일쑤였다. 6시에는 성인 초급반과 중상급반 하나씩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레인은 거의 비어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조금 힘들어도 연습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세 살 위의 오빠는 선수도 아니면서 유난을 떤다면서 혀를 끌끌 찼지만, 별 취미도 없이 꼼짝없이 수능 공부를 시작해야 할 운명에 놓인 고등학생의 히스테리 정도로 받아들였다.     


수영장의 차가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헤엄치면, 온몸이 가벼워지고 물과 하나가 되는 듯한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열심히 랩을 돌며, 본격적으로 기록을 재기 전 웜업을 하고 있었다. 두 바퀴를 가볍게 돌고 레인의 시작점에서 수경을 벗었는데 멀리서 빨간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못 보던 수영복인데?’     


시력이 나빠 수경을 벗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아 나는 호기심에 얼른 수경을 다시 꼈다. 6시에 자유 수영을 하러 오는 것은 드문 일이어서 나는 언제부턴가 수영장의 인원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새로 빨간 수영복에 흰색 수영모를 낀 여자애가 나타난 것이다. 딱 봐도 내 또래인 것 같았다.     


나는 수경을 낀 김에 다시 입수해서 연습을 이어갔지만 내 신경은 온통 오른쪽 옆 레인에 가 있었다. 한 바퀴를 돌고 돌아왔을 때, 그 애는 준비운동을 마쳤는지 레인 안에서 가볍게 출발하고 있었다.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잘한다. 날렵하게 움직이며 물살을 가르고 벌써 저 멀리까지 가 있었다.     


그날부터 난 그 애를 라이벌로 여겼다. 처음에는 왜 하필 우리 수영장에, 내 옆 레인에서 수영을 하게 되었는지가 야속했다. 그 애는 나보다 키도 7센티미터 정도 큰 것 같았고, 이미 가슴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 같았는데 그게 내 기분을 썩 좋게 하지 않았다. 가끔 강습을 마친 아주머니들이 “학생, 왜 이렇게 늘씬하고 얼굴도 조막만 하고 수영도 잘해?” 하며 그 애를 칭찬할 때면 그 뒤에 날 돌아보며 “학생은 수영도 잘하고 성실하고 아주 야무져.”라고 하는 말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양옆 레인에서 비슷한 시간에 출발해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때로는 내가 조금 더 빠르고 때로는 그녀가 더 빨랐다. 그렇게 여름이 점점 무더워지면서 나는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으로 연습에 더욱 열정을 불태웠다.     


대회 날 아침, 엄마한테 대회장의 분위기를 보려면 무조건 일찍 가야 한다고 잔뜩 성화를 피워 온 가족이 이른 시간부터 수영장에 도착했다. 오랜 시간 대회장에 머무르며 충분히 몸을 풀고 출발 조별로 서라는 말에 내 자리를 찾아갔다. 목운동을 하며 무심코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는데.... 그 애가 있는 게 아닌가. 매일 수영장에 오는 게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같은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살짝 눈인사를 했고 나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뭔지 위치도 딱 항상 내가 연습하던 끝 레인과 나의 오른쪽이 그 애였다. 대회장에 워낙 일찍 와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와 옆 레인에서 경기할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심장이 펄떡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경기를 시작하자 항상 옆에서 함께 하던 빨간 수영복이 묘하게 안심을 주었다. 정신없이 바퀴 수를 세며 헤엄을 치면서도 곁눈질로 빨간 수영복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편안했다. 드디어 마지막 바퀴째,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속도를 내서 터치패드를 찍고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봤다. 1위였다! 기록도 연습할 때보다 훨씬 잘 나와서 좋은 성적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오빠가 목 놓아 내 이름을 부르며 잘했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축하해.”     


그때 오른쪽에서 불쑥 악수를 청하는 손이 다가왔다.     


“조 1위는 못 했지만 내 최고 기록이야. 네 덕분에 가능했어.”     


그 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에 기분이 더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다.


“어... 고마워.”


하지만 그 애처럼 내 입에서 멋진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애가 내민 손을 붙잡고 힘껏 흔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천사의 얼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