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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Sep 19. 2023

소풍도시락

보이지 않는 엄마들의 경쟁. 

어릴 적 내 소풍의 기억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학교 앞 혹은 뒷산.


등산로 한편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빙빙 돌거나 장기자랑을 하고 선생님이 대놓고 찾으라는 듯 여기저기 뿌려놓은 보물찾기. 그마저도 못 찾던 던 나였지만 


그 즐거운 기억 중 가장 중요한 건 소풍도시락이었다.


난 급식세대도 아니고 매일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세대지만 소풍도시락만은 매우 특별했는데

그건 바로 김밥 때문이었다.


소풍날 아침이면 평소와 다르게 주방이 분주했고 햄과 계란, 절인 오이와 단무지가 들어간 단출하고 평범한 김밥이었지만 집에서 싼 김밥의 맛은 어린 내게 그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였다.

엄마는 김밥을 싸는 날이면 늘 대파가 송송 들어간 뽀얀 계란국을 함께 끓여주셨는데 허겁지겁 김밥을 먹다가 목이 멜 때 뜨거워도 후후 불어가며 한 모금 꿀꺽 마시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다 말은 김밥을 겉면만 살짝 프라이팬에 굴려 썰고 계시면 아빠와 나는 옆에 앉아 꼬다리를 주워 먹었다.

모양이야 예쁘지 않아도 밥은 적고 불쑥 튀어나온 단무지와 햄 같은 재료들 때문인지 꼬다리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이따금씩 예쁘게 썰어놓은 부분을 하나 먹을라치면 김밥 위로 슬쩍 올라가는 내 손위에 엄마의 손이 '찰싹' 올라왔다.

그렇게 정성 들여 싼 김밥을 소풍 가서 점심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동시에 뚜껑을 열면 신기하게도 다 같은 모양에 비슷한 재료이건만 집마다 미묘하게 맛이 달라 나눠먹는 재미도 좋았다.


지금이야 김밥천국 같은 김밥 전문점도 많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어서 김밥은 그야말로 소풍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서 그 특별함이 더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는 이제 김밥을 싸는 엄마 옆에서 꼬다리를 주워 먹는 딸이 아닌 그냥 김밥 꼬다리를 좋아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 첫째 아이가 처음 소풍을 갔을 때 먹기 좋은 작은 주먹밥과 김밥등을 싸서 보냈고 아이가 워낙 어렸던 지라 별 불만도 없었다. 

소풍시즌이면 인터넷에 캐릭터 도시락들이 유행처럼 올라왔지만 남의 나라이야기 같기만 했다.


'뭐 별 유난들이네~'


하고 넘겨버리던 그 사진들.


그 뒤로 코로나가 터지고 한동안 소풍은 없었다.

그러다 2022년 5살 둘째 아이가 소풍을 간다고 했다. 

나는 큰아이 때처럼 주먹밥과 김밥 그리고 약간의 과일을 작은 이단짜리 도시락통에 넣어 보냈다.


"잘 다녀왔어? 도시락 잘 먹었네~"


소풍 다녀온 아이의 가방을 정리하며 깨끗하게 비워진 도시락통에 뿌듯한 기분으로 말을 꺼냈다.


"응. 맛있었어. "


아이는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내게 머뭇거리더니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엄마 근데... OO 이는 토끼모양 밥을 싸왔더라. ☆☆이는 피카추밥을 가져왔더라고. 그리고 ◇◇이는 사람 얼굴모양 밥을 가지고 왔더라고. 



"어?"


당황스러웠다.

둘째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둘러말하는 것을 잘하는 편이었다. 또 그만큼 섬세하기도 했다. 저 말의 뜻은 친구들의 캐릭터 도시락이 부러웠다는 얘기일터였다.


저녁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식사를 도우면서도 둘째 아이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아이는 저녁을 먹으면서 아빠에게도 소풍이야기를 떠들었고 중간중간 도시락이 맛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한번 친구들의 도시락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아무 생각이 없이 듣는듯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나는 그날로 온갖 주먹밥틀과 모양내기제품들을 구입했다.


다음날 저녁엔 토끼모양 볶음밥에 짜장을 뿌렸고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저 틀 하나에 찍어냈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좋아했다.

케첩으로 눈코입을 그려주고 치즈로 찍어낸 모양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것들처럼 만들지는 못했는데 그건 내가 타고난 똥손인 탓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 년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아이의 소풍날이 돌아왔다. 


과연 일 년간의 트레이닝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인가? 


난 마트에 가서 거의 우리 가족 일주일치 식비만큼의 장을 단지 소풍도시락 하나만을 위해 샀다.

분명 이중 10%도 쓰지 못할 것이 분명했지만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 주저앉아 도안을 짰다. 일주일간 인터넷을 뒤지며 똥손인 내가 가능한 범위까지의 도시락들을 물색해 놓은 참이었다. 


"1층엔 미니언즈주먹밥과 포켓몬볼 주먹밥을 넣고.... "


내가 혼자 중얼거리며 종이에 적는 거을 보고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돼?"


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구상을 끝낸 뒤 잠이 들었다.


- 삐리리리리리리~~


요란한 알람소리에 깬 평소보다 이른 기상시간 5시 반.


난 냉장고를 열어 어제사온 재료를 식탁 위에 가득 늘어놓고 하나씩 미션을 완수했다. 


7시. 


아이들의 등원을 도와주기 위해 집에 오신 친정엄마가 기가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정리라도 좀 하면서 하지!!!" 


엄마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주방을 하나둘씩 치워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락이 완성되었다.



누군가에겐 허접해 보일지 모르나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무려 두 시간에 걸친 작업이었다. 결과물을 보니 저기에 쏟은 시간이 허무하기만 했지만 아이는 도시락을 보고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지를 치켜세워주었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그깟 두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지! 


새벽부터 일어나 아이의 도시락을 싸느라 정작 나는 밥 한 숟갈 못 뜨고 머리조차 빗지 못한 채 출근해야 했지만 아침부터 행복해하던 아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다만, 아이가 신나서 가방을 뱅뱅 돌리며 다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리고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주... 막내의 소풍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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