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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Oct 04. 2023

내 안의 아줌마.

낯설고 익숙한 내 안의 사랑스러운 아줌마.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와 같이 나가는 것이 싫었다.


특히나 절대 따라가지 않는 곳이 시장이었는데 버티고 버티다 명절 같은 때엔 손이나 보태라며 기어코 끌고 나가려는 엄마의 짜증과 잔소리에 따라나서면 항상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두어 발자국 떨어져 걷곤 했다.


오백 원 천 원 심지어 백 원 이백 원 단위로까지 목청을 높여가며 물건값을 깎아대는 엄마가 창피했기 때문이었다.


"뭐 남는 게 없어? 이거 다 남는 거구만"


깎아주기 전에 셀프 디스카운트를 이미 끝낸 엄마는 가게주인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돈을 던져주고 나오기도 했고 흥정을 하다가 싸우는 적도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스무 살이 넘었을 무렵부터는 엄마와 함께 나갈 일이 없었는데 그래도 한 번씩 나갈 일이 생기면 혹시나 싶은 생각에 두어 발자국씩 떨어져 걷고는 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뒤처져있는 나를 손짓해 불렀고 마지못해 다가가면 내 손을 꼭 쥐고는 


"우리 딸이야. 이쁘지?"


하며 자랑을 했는데 그마저도 부끄러워했던 이제와 돌이켜보면 오히려 내 모습이 더 부끄러운 어린 날이었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앨범 더미를 들고 우리 집에 들렀다.


"이제 네가 가지고 있어."


앨범은 내 어린 시절부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는데 중간중간 엄마의 사진이 한두 장씩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엄마는 한번 휙 쳐다보더니 사진을 보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엄마 처녀 적에. 엄마 앨범이 다 없어져서 몇 장 안 남은 거 둔다는 게 거기다 끼웠나 보다"


예뻤다.


친구들과 유원지에 주르륵 서서 70년대 미스코리아대회 포즈처럼 살짝 옆으로 비스듬히 일렬로 늘어선 여자 대여섯 명 중에 하얀색 비키니를 입은 우리 엄마는 단연 눈에 띄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억척스러운 아줌마였는데 그때의 엄마마저도 지금 사진으로 들여다보니 젊고 어리고 예쁜 사람이었다. 

어린 나를 안고 웃는 모습은 마치 소녀 같았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30대에 들어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 나 역시도 이렇게나 가정을 꾸려가는 게 버거운데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엄마의 삶이... 그렇게 억척스레 사는 삶이 엄마라고 좋았을 리 없다. 


그 모든 것들이 엄마에게는 살아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는데 나는 엄마를 억척스러운 아줌마라며 부끄러워했다.

엄마는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딸을 보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제는 나도 아줌마로 불려도 어색함 하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시장 갈 일도 별로 없고 가격표가 딱딱 붙어있는 마트를 주로 이용하지만 세일(sale)이라는 글자를 보면 뭔가 구매욕이 솟구치고 우유 하나를 살 때도 가성비를 따지게 되었다.


5만 원짜리 족발 보쌈을 먹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500원 1000원은 예민하다. 


이따금씩 흥정할 일이 생기면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게 익숙해지기도 했다. 돌아서면 부끄러울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다. 


목이 늘어진 티를 입어도 아이만큼은 브랜드의 옷을 입히고 나는 슬리퍼를 끌고 다녀도 아이는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겼다. 


어릴 때 엄마가 남긴 음식이 아깝다며 먹을 땐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난 지금 내 아이들의 식판에 남긴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 거울을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습과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샌가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버렸다.


누굴 원망할 것 없이 내가 선택한 삶이지만 그 와중에도 이따금씩 엄마의 모습이 겹쳐 생각날 때면 그때에 엄마에게 던졌던 한마디 한마디가 이제와 비수처럼 다시 날아와 가슴이 꽂혀 그 미안함이 되새겨진다. 


"딱! 너 같은 딸 하나만 낳아라!"

엄마가 농담처럼 던졌던 그 말이 가끔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내가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더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오늘날 내가 가진 것들의 대부분은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줌마가 되었고 집앞 슈퍼나갈때조차도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만지던 내 남편은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었다. 

지금 우리의 평화가 안정이. 서로 간의 조금씩 양보와 희생으로 지켜져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마저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우리 아이들과 남편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아마도 징그럽다고 말하겠지만 우리 엄마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여전히 충분히 사랑스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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