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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다 Oct 18. 2023

여자의 일과 평등의시대.

다시 태어난다면 남자로 태어나겠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과 영화가 화제가 된 해가 있었다.


그 화제성에 개봉된 영화를 먼저 보았을 때는 공감이 힘들었다. 

극적인 요소를 강조하려는 건 알겠지만 너무 궁상맞더라. 그 정돈 아닌데.  그리고 공유가 남편이라니.... 


시간상의 문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영이의 삶에 대한 관점보다는 그냥 여자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힘들다. 여기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은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책을 먼저 읽어보는 편이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독서'라는 행위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언젠가 읽어는 봐야지 하고 구입해 두었던 책을 아이들이 일찍 잠들었던 날 꺼내어 읽어볼 수 있었다.

영화와 달리 책 속에서는 그녀의 삶 전반에 걸쳐 성장과 느꼈던 정서 그리고 결혼과 출산의 전과 후의 삶이 있었고 그랬기에 그녀의 혼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따금씩 누군가에게 "다시 태어나면 어떻게 살고 싶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난 바람이 될 거야~' 라거나, 혹은 '재벌 2세!!' 같은 답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남자. 그냥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





남녀의 성별 싸움을 부추기는 이야기는 아니다.


남-여자는 좋겠다. 군대도 안 가고

여-여자는 애 낳잖아 

남-남자는 예비군에 민방위에 전쟁 나면 나라도 지켜야 돼.

여-여자는 생리해. 그리고 전쟁 나면 그 나라엔 너만 사냐?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유치한 말장난이다.


애초에 누가 얼마나 힘든지를 배틀한 것부터가 무의미하지 않을까? 다들 제 삶이 가장 버거울 테니.


그저 나로 살 때는 내 삶에 불만이 없었다. 

즐겁고 편안했다. 내가 보살펴야 할 존재는 오로지 나 하나였다. 

가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그 어떤 것을 하든 자유로웠다. 


그런 내  삶이 '엄마'가 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출산 전과 후의 여성의 신체는 확연히 다르다. 심지어 다산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예전과 같지 않게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몸으로 익숙지 않은 육아가 시작된다. 


세상 부담스러운 말이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이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조심해라. 쉬어라." 하던 세상이 출산 이후에는 "애는 너 혼자 낳았냐? 유난이다."라고 한다.


그뿐일까. 갓난아기가 자라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가고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역할은 끝이 없다.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여야 하나 고민하는 게 그렇게 큰 스트레스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이가 자랄수록 먹는 것 입는 건 하다못해 태권도학원 하나만 다니기 시작해도 아이가 셋이다 보니 경제적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해 맞벌이를 선택했다. 


전쟁 같은 아침시간 남편은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 입고 출근한다. 


나는 세 아이의 유치원과 학교에 보낼 물통과 간식을 싸고 아침식사를 준비한 뒤 세 아이를 깨워 씻기고 입히고 아침을 먹이고 통학버스에 태워 보낸 뒤 출근을 한다.


그런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고 나면 오히려 회사가 더 편안한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회사는 일한 만큼의 성과와 보상이 따른다. 


퇴근 후에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저녁을 준비하고 상을 차리는 동안 퇴근한 남편은 씻고 아이들과 놀아준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나면 남편은 아이들을 씻기고 놀아준 뒤 재우고 나는 그사이 하루종일 온 가족의 자취(빨래, 세탁, 설거지, 집청소)를 정리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유난히 설거지가 많아 멍하니 서서 설거지를 하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크게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소외감과 함께 가족이 아닌 가정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내 힘든 삶은 '엄마'라는 이유로 시작되었건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좌절과 고통을 씻은 듯이 한 번에 사라지게 하는 기쁨 역시 아이들이라는 점이다.


의자에 앉아 "아이고~ 어깨야~" 하면 어디서 들었는지 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그 작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내 어깨를 주무르고 피곤해서 잠시 누워있으면 어느샌가 내 옆에 앉아 내 가슴에 손을 얹고 그 귀여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준다. 


내 지친 몸을 돌보기엔 부족하지만 내 맘을 보살피기엔 부족함이 없는 손길이다.


그것은 친구에게도 한창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이성에게도 부모님에게서조차 찾지 못했던 위로다. 


아이는 사는 내내 허전했던 내 삶의 일부분을  메워 이제야 비로소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다. 

온전하게 채워진 나는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물론 사람마다 집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여성으로서 사는 나의 삶은 고단하다.


남녀평등시대라고는 하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교육받으며 보고 자란 세상은 


남자는 바지 / 여자는 치마

남자는 짧은 머리 / 여자는 긴 머리 

남자는 바깥사람 / 여자는 안사람


이었다. 


지금은 물론 많이 바뀌긴 했다. 하지만 쇼트커트의 머리의 여자가 멋진 걸크러쉬의 매력을 뽐내고 치마와 바지를 패션으로 골라 입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직도 남자가 장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치마를 입는 것은 불편해한다.


단지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이럴진대 삶의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사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평등이라는 단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증명의 연속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정도는 해야 '남녀평등'의 단어에 발가락 하나쯤 얹을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지금은 평등의 시대가 아니라 증명의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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