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어린 내가 몹시 좋아하던 노래 중에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이라는 가사가 든 노래가 있다. 검색이 만능한 시대라 노래 제목을 찾아보니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이쁜 제목이다. 순한 바람이 감미롭게 내 몸을 간지르고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던 그 동요는 언제나 나를 행복의 뜨락 비슷한 곳으로 데려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때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슬픔에 빠져있을 때면 주문 외듯 살살 그 노래를 읊조리는 습관이 내게 있었다. 당시의 어린 나를 둘러싸고 있던 편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펼쳐놓은 푹신한 햇이부자리 위를 목욕 마친 맨몸으로 뒹굴며 즐기던 촉감의 기억을 그 노래가 제일 잘 불러내오기 때문이었던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지나간 뒤 돌아보니 그런 것 같다.
행복이니 불행이니를 알 턱이 없었던 그때부터 어린 내 마음을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녔던 바람. 세상의 살갗과 내 마음의 살갗을 무죄하게 부드럽게 섞어주곤 하던 바람. 기억할 수 없는 그 어느 때 이후, 소실점 속으로 사라지는 길처럼 떠나버렸던 바람. 빨랫줄에 드리웠던 이불이 걷힌 뒤의 하늘처럼 내 기억의 하늘가에서 걷혀져 버렸던 바람. 그 바람은 어디로 가버렸던 걸까?
날이 지표의 저 아래쪽에서부터, 그리고 하늘 속 저 위에서부터 식기 시작한 줄을 계절에 앞서 아는 초목들이 미리부터 가을 채비를 갖추기 시작하는 즈음. 늦게 자라기 시작해서 가느다란 오이 세 개를 맺고는 누르게 시들어가는 오이 잎사귀들을 말라 꼬부라진 가지로부터 잘라내기로 했다. 볼썽사납게 질겨진 가지 마디에 생뚱맞게도 여리고 포근한 새잎이 돋아났기 때문이었다. 조그만 전지 가위로 살금 살금 어린 잎들을 피해가며 시든 잎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아니었다면 더 긴 날을 가지에 남아있어도 좋았을 늙은 잎들이 아직은 다 마르지 못한 줄기와의 절단면에 주르르 수액을 남기며 잘려 나갔는데 가위질에 툭툭 떨어지는 색 바랜 잎들이 돌바닥에 차례로 나뒹굴며 뜻 밖에도 낙엽 시늉을 낸다. 서걱대는 얼굴을 맨땅을 부비며 때 이른 별리를 슬퍼하는 몸짓을 한다. 아 이 뜨거운 캘리포니아 메마른 돌바닥에 오이 잎이 시늉 내는 낙엽이라니. 때를 맞춘 듯 얇은 홑이불 같은 바람이 펄럭이며 날아와 내 몸을 잠시 싸안은 후 마른 가시 바삭대는 잎들을 후르르 흩어 놓고는 풀 밭 건너 유칼립투스와 실버펀 머리칼에 가서 널린다. 흔들리는 가지에 조롱조롱 맺힌 작은 새들의 노래 위에 와스스 잎들의 합창을 일깨우며. 그 광경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은 바로 그 순간 내 입술이 나도 모르는 새 저 혼자 들썩이며 불러내온 노래 -
여름에 나뭇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 준대요
내 의식의 구석방, 잊힌 지 참 오래인 그 먼 방에서 익살스레 땀을 훔치는 나지막한 동안의 나무꾼이 걸어 나왔다. 다시 보니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문닫혀 있던 그 방으로부터. 발 아래 떨어진 누른 잎들은 땅바닥에 얼굴을 문지르며 울고 있는데.
나무 꼭두서니에 새로 돋은 여린 햇잎부터 둥치 아래쪽에 좌정한 늙은 잎들까지 멱 감기듯 훌훌 흔들어 섞으며 나무들을 품어 안고 노니는 바람. 그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은 시들은 가지 중간에 철 모르고 돋아 나온 어린 오이 잎사귀에게 언젠가 내게 그랬듯 이 세상 행복의 뜨락을 한 번 구경시켜 주고 싶었나 보다. 그러니 떠나가는 것들에게도 필시 마지막 행복을 주었을 것이다.
그 바람은 좋고도 고마운 바람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