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프러스

by 감자도리

마프러스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다섯-여섯 살의 아이였던 시절 살았던 집의 화장실 욕조 위에 놓여있던 바디워시를 기억한다. 연분홍색 바디에 돌려서 열어야 하는 진분홍색 뚜껑이 단단히 잠겨있던 마프러스. 나를 씻겨줄 때면 엄마는 바디타월에 마프러스로 거품을 낸 뒤 내 몸을 박박 닦았다. 옅게 반짝이는 분홍빛 액체였지만 왠지 모르게 연둣빛의 향이 났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나는 여전히 연두색 마프러스를 기억한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남자아이를 소개받았다. 그 아이의 미니홈피에 올라와있던 단체 사진에서 나는 Y를 보게 되었다. Y는 유행했던 샤기컷 머리를 한껏 세운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소개받았던 아이의 친구인 Y도 소개받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Y는 내가 연락을 주고받는 유일한 남자아이가 되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쉴 새 없이 Y와 나는 문자를 해대었다.


문자와 전화를 주고받은 지 2주쯤 지난 후,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 여름이 막 시작했던 날, 학교가 끝난 후에 우리 학교 근처 소방서에서 Y와 나는 처음 만났다. 빨간 소방차들이 나란히 줄 서 있었고, 그 앞에서 Y는 하늘색 교복을 입고 포스미드 운동화를 신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곤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런 Y의 모습이 여름날 눈부신 햇빛보다 선명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소개받았던 날, 그리고 서로의 미니홈피를 들락거리며 보았던 사진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꽤나 더운 날씨였지만 Y와 나는 더운 줄도 모르고 어색한 순간조차 즐기며 대화를 나눴다.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주는 닭갈비볶음밥을 먹고, 그네의자가 있는 곳에서 생크림 눈꽃빙수도 먹었다. 오락실에 달려있는 코인노래방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노래도 불러주며 오후를 보냈다.


사는 동네가 같았던 우리는 106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창밖으로 남색 하늘이 보였다.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Y와 나는 집에 가까워짐을 아쉬워했다. 우리 집 버스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Y에게 아쉬운 안녕을 말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순간 Y는 나를 따라 내리며 내 옆을 걸었다. 아파트 쪽문에 도착했을 때, Y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사귈래? 나는 물었다. 어? Y는 다시 한번 말했다. 나랑 사귈래? 나는 답했다. 그래!


나는 계단을 우다다 뛰어내려가 집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세상이 멈춘 듯했고 살아있는 건 나 하나와 내 심장인 듯했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귀에서 울렸고, 거울을 보진 못했지만 내 얼굴은 뜨거운 빨강이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를 때에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Y는 버스정류장 두 코스를 전속력으로 뛰어가 집에 들어갔다고 했다.


Y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까지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이후로도 1년 간을 더 만난 셈이다. 내가 머리를 잘라 귀밑 7cm의 단발머리가 되었을 때에도, 빨간색 커플 운동화를 도둑맞았을 때에도 Y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18살의 5월, Y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헤어지자고 말했다. 2008년 5월, Y는 사라진 마프러스가 되었다.


Y와의 이별 이후 한 번의 연애가 있었지만 이내 끝나버렸고 나는 달마다 돌아오는 모의고사와 수능에 힘을 썼다. 수능을 마치고 19살의 끝자락에서 Y와 연락이 겨우 닿았지만 그마저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선 더 이상의 답장을 보내지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 Y가 K로 개명을 했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 외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리지 않았다.


Y는 지금 어디서 사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떠한 근황도 알지 못한다. 매년 새로운 여름이 오고 가지만 그 시절의 여름은 아직 내 시선에 머물러있다. 코끝을 간질이던 마프러스의 향기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던 Y는 내 기억 속에 숨어 있다. 초록이 시작되는 여름의 입구에서 연두색으로 물들어 분홍색의 춤을 추었던 Y와 나를, 여전히 나는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