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통영
오랜만에 책꽂이 정리를 했다. 가끔 어떤 책은 표지만 봐도 읽었던 당시의 상황과 느낌이 오롯이 떠오르곤 한다.
지난 가을 우연히 이병률 작가님을 만났다. 당시 혼자 몇 주간 통영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널널한 하루하루 슬슬 심심해질 차에 마침 독립서점 봄날의 책방에서 저자의 북토크가 열리는 걸 알게 됐다. 인스타에서 발견하고 신청하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폼이 없었다. 너무 늦게서야 알게 됐기도 해서 마감인가 싶었다. 책방에 방문한 겸 기대를 버리고 물었다. “혹시 금요일 북토크는 마감된 건가요?”
다행히도 취소자 몇몇 분이 계셔서 문 닫고 간신히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북토크 신청비로 신간「혼자가 혼자에게」를 받았다. 예쁜 귤색 표지의 동네책방 에디션으로! 나홀로 돌아다니던 중 손에 들어온 이 책이 마침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느껴졌다. 레알 혼자가 혼자에게였다.. 직원분께 보통 참석자분들은 책을 읽고 오시는지 여쭤봤는데, 북토크 당일에 책을 수령하기 때문에 읽고 않고 오시는 분이 대다수라 하셨다. 나는 미리 서점에서 수령함으로써 신간을 읽고 갈 기회를 얻게 됐다.
저자의 글은 차분했으며 쓸쓸함에 익숙한 사람이란 느낌을 줬다. 만나기 전에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인상이 있었다. 그치만 북토크 날 본 저자의 실제 모습은 글에 묻어난 느낌과는 다소 달랐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면서 적절한 농담을 섞는 여유와,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이끌어가는 능력을 지닌 보다 밝은 사람으로 보였다. 관중 앞이라 해서 과장되게 쾌활함을 표현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그저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외로움에 허기지지 않을 것이다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북토크가 끝난 후 마지막으로 한 명씩 사인을 받을 순서가 됐다. 타지 생활에서 친구가 되어준 내 책을 꼭 안고서 줄을 섰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왔고 작가님과 이런저런 짧은 대화를 나눴다. 한 명당 기껏해야 열 마디 대화쯤이 가능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꼭 전하고픈 말이 있었다. "저는 로봇이 주인공이었던 부분이 제일 좋았어요!"
귀퉁이를 접게끔 한 몇몇 부분이 있었다. 그중 로봇이 주인공이었던 짧은 산문 「당신이 나를 따뜻하게 만든 이유」는 가장 좋았던 부분이었다. 어떤 글은 마치 거울과 같이 내 마음을 비추어준다. 자기 자신의 일부는 특히나 눈에 띄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게 무엇이든 내 안에서 한번 거쳐가지 않은 것은 애초에 발견할 수 없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렇기에 저자와의 공명은 매번 큰 기쁨을 준다. 내가 글을 읽으며 당신의 어떤 부분과 이어졌는지 전달하고 싶었다. 책을 미리 읽은 참석자만이 말할 수 있는 특권 흐흐. 나의 말에 작가님은 귀를 잡고 부끄러워하며 웃으셨다. 그 잠깐의 표정은 긴 여행 중 가장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