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일단 나는 왜 뭔가를 쓰고 있을까.
처음엔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였다.
힘들 때마다 뭔가를 썼다. 느낌과 감정에 사로잡혔을 때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했다. 마음을 자문하다 보면, 이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원인이 명확해지면 기분이 훨씬 나아지곤 했다.
글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불행한 상황이 뚝딱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줄 한 줄 풀어내면서 내 생각의 꼬이는 부분이 어디인지, 불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적어도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후련했다. (......) 그 시간만큼은 전세자금 걱정, 아이들 성적 걱정, 부모님 건강 걱정 등 정체 모를 불안감이 사라진다. 그 점이 참 좋았다.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런 기회는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장치를 통해서 나를 세속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는 것들과 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으니, 관성적 생활 패턴에서 한 발 물러서는 기회만으로도 글 쓰는 시간은 소중하다.
ㅡ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무엇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장 힘들게 느껴졌다. 불안의 의미부여가 이루어졌을 땐 그래도 훨씬 편했다. 목표를 위한 과정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불안과 같이. 예를 들어 과거 재수했을 때. 대학 입학이라는 목적이 명확했을 땐, 그 과정에서 오는 불안은 감내하기 쉬웠다. 의미가 확실하니 불안이 정당화된 것이다. 그땐 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뿐이었고, 다른 선택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재수 땐 생각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며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내 1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목표가 명확하지 않을 때 불안은 증폭된다. 수많은 선택이 놓여있고 그에 따른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선택이 불러올 미래의 결과들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최선의 선택일까. 그저 다른 사람들만 쫓고 있는 건 아닌가. 적당한 한순간의 선택에 따라, 모든 걸 뒤바꿀지 모를 행복을 놓치는 게 아닐까. 작년엔 이런 생각과 불안에만 갇혀있었다. 영상편집 시작 때도 그랬다. 작년부터 계속 관심 갖고 배우고 싶었는데도, 지금 이거 배우는 게 맞는 건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막상 시작하고 나니 과거의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단 걸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학원 다니는 내내 즐겁고 재밌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하려 들면, 생각에만 갇히게 된다는걸 배우게 됐다. 선택에 따른 미래의 결과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냐 뿐이다.
그치만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틀림없이 같은 선택을 했을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이처럼 맞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믿음 속에서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진실된 삶이란 바로 그러한 믿음 속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글을 쓰는 과정은, 이런 믿음에 가까워지게 해 주었다. 스스로를 온전히 마주하는 과정에서 나를 이해하는 언어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생각의 확신을 낳았다. 확신은 행동을 이끌었고, 행동은 상황을 바꾸었다.
생각을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았다. 나는 이미 어떤 가치 체계에 휘말려 있었고, 그것은 내 삶을 배려하지 않았음을.
근데 이러한 글쓰기의 의의는, 혼자 보는 글에서 나왔다. 나는 공개하지 않는 글만 써왔으니까. 기존까지 나에게 글쓰기는 감정의 출구였다. 공개하는 플랫폼인 브런치를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화한 셈이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 아직까지도 낯설고 신기하다. 관객의 유무가 큰 차이를 주는 것 같다. 이러한 변화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단 장점으로는 글 쓰는 재미와 원동력이 늘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보이고 하트가 올라가면 정말 기쁘다. 또한 동시에 드는 생각은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지, 또 솔직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덧붙여 기존의 자기만족을 위한 글에서 나아가, 사람들과 더 많은 생각을 공유하기 위해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건 꾸준히 고민해야 할 문제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