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맛, 종가집 '묵은지'에서 김치 1/4 포기를 꺼내어 가위로 숭덩숭덩 자른다. 기름을 한 바퀴 둘러 예열한 냄비에 김치를 치이익 넣고 타지 않게 계속 저어주며 김치가 반투명해질 때까지 볶다가, 참치캔 큰 거 하나를 다 넣고 같이 볶는다. 참치살과 김치가 한데 어우러지며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물을 한 컵 부어주고 두부도 넣은 뒤 다진 마늘, 대파 넣고 센 불에 발발 끓여내면 참치김치찌개가 완성된다.
두부를 먼저 건져먹고 참치를 먹으려고 하니 살이 다 부스러지고 풀어져서 건져먹을 건더기가 안 보인다. 김치랑 같이 볶지 말고 맨 마지막에 얌전히 올릴 걸 그랬나. 근데 백종원 아저씨가 단백질이랑 같이 볶아지는 그게 맛있는 거랬는데... 국물을 한 숟갈 뜨니 풀어진 살이 같이 올라온다. 밥 비벼 먹어야겠다. 참치김치찌개에 참치캔 큰 거를 넣든 작은 거를 넣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살림은 해도 티가 안 나는 일 투성이다. 커튼을 1년에 한 번 빨든 이사 갈 때까지 안 빨든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동그랑땡에 부추를 넣든 대파를 넣든 솔직히 별 차이가 없고, 흰 빨래에 과탄산을 넣든 안 넣든 어차피 빨래는 잘 된다. 계란찜이 기가 막히게 되었다고 해서 자아효능감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알아봐 주는 이 없는 업무영역에서 나 혼자 이런저런 궁리하며 노는 게 지겨워지면 더 이상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하던 대로만 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지독한 지루함이 된다.
집안일이 지치는 이유 중 하나가 티가 안 나기 때문 아닐까. 괄목성대할만한 업무 성과라는 게 없고, 커리어가 쌓이며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도 없다.옆집 언니가 놀러 와서 "어머, 자기 쓰레기통 바꿨네? 색깔 이뿌다!"라고 말해주면 좋으련만. 잦은 이사로 아는 언니가 없다.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자기 효능감'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일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마음. 타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확신.
: 신연선 《하필 책이 좋아서》 중 p225
직업이 전업주부인데. 살림이 외롭고 고독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는 일과 나를 동일시해서 스스로를 점점 더 칭찬하지 않게 되었다. 살림살이 중 잘하는 부분이 있어도 나조차도 알아봐 주지 않았고, 잘 못 하는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며 일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안 웃기는 개그맨이 된 것 같았다. 우울했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셀프로 감금했다.내가 하는 일은 안 하면 티가 금방 나지만 해도 티가 안 난다. 그러니까 어차피 안 하는 것만 눈에 띈다.
이런 내가 《아무튼, 살림》이라고 제목을 달고 쓴다. 출판사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에서 발행하는 그 시리즈를 따라한 거 맞다.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를 짝사랑해서 나에게도 그런 대상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살림'이었다. 이 브런치북을 쓰면서 내가 10년 넘게 꾸준히 해온 유일한 일인 살림에 대해, 과연 그것을 좋아하는 게 맞는지 스스로 탐구해 보고 싶었다.
요즘은 우울의 시기를 떠나보내고, 그냥 한다. 그냥 뭐 내 일이니까 한다. 설레고 재미지고 바라만 봐도 좋은 살림은 아니지만 특별한 의미 없이 매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 붙일 의도가 없어지자 집안일이 제법 만만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내가 완료해 낸 일에 대해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잘했다고 추켜세워주길 바라는 마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살림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가고 있다. 기대하는 이는 없고 실망하는 이만 있는 이 업무에서, 집안일을 하는 행위 자체에 집중해 보니 그게 또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설거지를 할 때는 오직 거품이 씻겨나가는 것만 보고, 밀대걸레질을 할 때는 방바닥만 쳐다보고, 빨래를 널 때는 빨랫감의 오와 열을 맞추는 데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수도꼭지만 틀면 이렇게 따뜻하고 깨끗한 물이 나오는 건 고마운 일이네.' 하는 부처님 같은 생각이 저절로 마음속에 떠오르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니 내가 왜 이러지 흠칫 놀라기도 한다.짜릿한 맛은 없어도 은근하게 퍼지는 나의 콧노래가 살림에 대한 나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나는 아마 살림을 좋아해... 좋아하..... 좋아하게끔 나를 길들이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