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나는 종종 아니 자주 글쓰기 대회에 나가 입상한 적이 있다. 혈통을 타고 내려온 유업은 아니겠고, 가문의 누가 글쓰기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제로 글짓기가 주어지거나 교내에서 작은 백일장이라도 열릴라 치면 주제 위에 골조를 만들어 무언가를 쓰고 창작하는 일을 나는 매우 즐거워했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레 책을 가까이하고 지내는 분위기는 아니었음에도 가끔은 내향형 외톨이가 되어 문고에 꽂힌 전집 도서를 읽으며 어딘가 있을 법한 상상의 나라를 꿈꾸는 걸 좋아했다. 이과 계열 과목은 낯부끄러운 수준의 점수였지만 국어와 문학 그리고 외국어를 포함한 언어 영역에서는 항상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걸 보면 부인할 수 없는 문과 체질. 대학과 대학원 전공이 모두 언어인 탓에 겨우 겉만 핥은 수준일지라도 까뮈며 보들레르 칸트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과 호기심에 영미 문학가들의 작품도 기웃거려 두었으니 어쩌면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몸속 어딘가에 글쓰기 유전자를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직장을 다니면서는 당장에 먹고살 수 없는 글쓰기는 안중에 없었다. 눈과 마음의 정욕을 좇아 사회적 기준에 부합한 사람이 되려 파릇한 시절을 이글거리듯 보냈다. 늦깎이로 들어간 대학원을 겨우 졸업한 후 모든 것이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 인생의 구간에서 신기하게도 나는 다시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앞으로도 대문호 따위는 될 수 없겠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지금부터라도 나만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그 자체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그에 더해, 내 옅은 폭과 결이 누군가에게 공감이 되어 공통분모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동기가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글 쓰는 일이 스스로에게 합당한가', 라는 자문형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스’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는가?
창작의 영역은 무한대이고 주제와 대상 또한 그 범위를 정할 수 없다. 처음에는 돈 되는 글쓰기를 좀 해볼까 싶어 웹 드라마나 웹 소설 플랫폼을 기웃거렸다. 인기 순위의 글들을 쭉 훑고 나니 아직 활자에 관해서는 20세기형인지 모바일이나 인터넷으로 창작물을 읽는 일이 썩 익숙지 않게 다가왔다. 소파 귀퉁이에 누워 비비 꼬며 책을 읽는 자적한 시간을 사랑하고, 배 깔고 누워 지류를 읽는 소소한 즐거움을 푸른 형광 빛 전자파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나의 개인 취향일 뿐이다. 글쓰기를 하며 가능한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줄거리가 산으로 가든 들로 가든 자극적이든 폭력적이든 개의치 않고 양심을 굴하게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지, 싶은 나름의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 같은 나부랭이가 좀 끄적거린다고 해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거나 세상을 구원하는 일 따위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뭐랄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 낡을지언정 내 삶이 만들어낸 신조를 그대로 지키고 싶어졌다. 그러니 소소한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내 양심선을 범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적어도 소수에게는 조금 도움이 될 만한, 즉, 누군가의 삶에 잔잔한 파장 하나 일으킬 수 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써내리는 것. 그것이 내 콘텐츠의 방향이 될 터였다. 그러면 된 거였다. 독자가 누구일 것이고 어떤 방식으로 읽힐지는 내 영역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양심의 기준선을 정해 두지 않으면 뒤늦게 시작한 나의 글쓰기가 언젠가는 방황을 맞을 것 같아 관심 없을 질문에 대해 여러 번 자문을 거듭하며 글을 쓰고 있다.
전달 방식에 대해서도 잠깐 고민해 보았다. 글쓰기 영역에서 무한 가능성을 보았다면 진작에 출간 욕심을 내고 블로그나 SNS를 통해 작업의 향상성을 유지하며 글을 써왔을 텐데, 나는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주의자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내 사소한 글 놀림이 주목받으리라 여기지도 않았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로는 결코 살 수 없어 내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그간의 에너지를 쏟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 마음의 방점을 이동시킨 것일까. 그것은 이만하면 됐다는 개인적인 이유 외에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기묘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부분 나의 시간은 코로나와 함께 죽어 있었다. 내가 몸 담았던 교육 시장이 하이브리드형으로 진화해 여전히 존재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세상의 중심점이 현실 세계에서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본래의 내 존재 외에 또 다른 생명력으로 내 존재를 확장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지각이 흔들리며 혼란 속에 만들어진 소리 없는 기회를 이제는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창작 플랫폼을 여러 번 맞닥드리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나는 지금 조용히 떠밀려가고 있다. 게으르고 추진력 없는 나에게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다.
그렇다면 전달 방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작업물의 전달과 관련한 부분은 온전한 나의 영역인가. 독자의 범위는 어디까지가 될 것이다. 개인적 소통에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범주로 확장할 것인가. 세상을 기다릴 것인가. 내가 세상을 택할 것인가. 이윤 창출의 목표는 어느 선으로 예측할 수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그리고 이까지 미친 내 사고의 흐름이 조금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그저 상 위에 올릴 메뉴 몇 가지 정하고 재료를 다듬고 있을 뿐인데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머리로 미리 다 해버리려는 성급한 습성, 욕심은 눈을 가리고 가야 할 목적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적당히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타인이 부여하는 자격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았다. 살아오며 수많은 자격에 시달렸다. 대학 갈 자격, 취업할 자격, 결혼할 자격, 자녀를 가질 자격, 심지어 특정 동네에 살 자격 등등. 그러나 창작은 다른 영역이다. 창작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가 누리고 겪는 모든 것으로 다시 만물을 발하게 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권한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창작할 자격과 형식 그리고 전달 방법에 대해 더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떤 것은 습작이 되고 어떤 것은 습작을 거쳐 온전한 창작물이 되겠지만 미약한 시작이 끝의 크기와 너비를 다 예측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 성실하게 매일의 작업을 이어 한 자 한 자 노력을 더해 미미하더라도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글을 써나가도록 작업의 능력을 향상해야 한다는 점이다. 걸음의 끝은 가보아야 아는 법일 테고. 그러니 인내심을 갖고 달려 나갈 일이다. 가본 자만 볼 수 있을 저 너머의 미래 그리며 몸을 움직여 나아갈 일이다. 그저 오늘의 이야기를 성실히 써나갈 일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반짝반짝 빛날 현실을 꿈꾸며 그저 희망을 한번 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