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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라이터 호 Dec 22. 2021

저자? 작가? 글쓴이?

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조용하고 질서가 부족하던 월요일 아침은 반복된 조련을 거쳐 그런대로 잘 길들여졌다. 아파트 커뮤니티 체육 시설이 문을 닫고 제법 겨울인 듯 차가운 날씨가 강바람의 성질을 돋우어 쉽사리 산책은 잇지 못하고 있지만 일주일에 두어 번 다른 운동으로 몰입의 시간을 가지며 나쁘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다. 나뉜 절기의 단위를 따라 조이고 풀기를 반복하는 일들이다. 이렇듯 글쓰기도 훈련된 시간으로 분량을 꾹꾹 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양으로 승부해 박리다매 식의 글을 남기는 건 내 스타일은 아니어서 정을 쪼듯 시간을 두드리고 생각을 깎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호흡을 더하려 안간힘을 써본다. 처음엔 봄 길 노니는 바람처럼 가벼워 흔들리는 대로 흐르다가 시간이 지나며 언어의 기록이 주는 묘한 부담감을 마음으로 느끼다 이제는 욕심이랄까 의지랄까 시시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거지면서 사소해 보이는 나의 쓰기 행위에 조금씩 책임이 더해지고 있다. 초보 딱지도 떼지 않은 서투른 연수생의 무모한 패기쯤 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쓰는 일은 일상처럼 이어나갈 것이고 이 쓰기 행위에 약간의 진지함을 가미해 아무도 강제하지 않은 나름의 책임 의식을 조금 더 보태기로 했다.


무엇을 쓰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작업물의 범위와 한계는 제한하고 싶지 않다. 쓰다 보면 말 따라 글 따라 채워지는 글도 있겠고 의도와 콘셉트를 갖고 몰입해 만들어낸 작업물이 생겨날 수도 있겠다. 내 분야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통찰을 섞어 교육 저서를 한두 권쯤 만들어낼 수도 있겠고 시절마다 나부끼는 감정을 나비처럼 나빌래라 자유롭게 글을 쓸 수도 있겠다. 아마도 늘 그랬듯 나는 이번에도 제너럴리스트가 될 모양이다. 누군가는 많은 걸 잘하는 것 말고 한 가지를 매우 뛰어나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동의하는 바다), 흉내 내려해도 그런 류의 성질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걸 보면 결국에 사람은 다 제 생긴 대로 사는 것도 같다. 다소 산만한 구석이 있기도 호기심이 많기도 상상을 즐기기도 뭐 또 조금 포장해서 시대에 걸맞게 조금은 창의적인 구석이 있기도 한 걸로 매듭지어 두자. 여기서 일단락.


되고 싶은 것은 ‘저자’요 '작가'씩은 아니다. ‘작가’란 문학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저자’란 글을 써서 책을 지어낸 사람(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이 말을 가지고 한동안 글을 쓰는 정체성에 관해 아직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조금 해보았는데, 흔히 요즘은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을 작가라고 이름 붙여 부르지만 사견으로는 이 말이 조금은 구분되어 사용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우선, 나는 문학작품이나 그림, 조각 따위의 즉, 다시 말해 예술에 가까운 '작품'을 아직은 만들어 낼 자신은 없기 때문에 나중에 책을 출간하여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더라도 '작가님'씩으로 불리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불리고 싶지 않다기보다 아마 그렇게 불리기에는 부끄러울 것 같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름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글쓴이는 작업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삼자적 표현이니 열외로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냥 '저자'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글쓴이'는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주로 쓰는 말이고, '저자'는 글을 써서 책을 지어낸 사람이라는 의미니, 앞으로 여러 권 책을 좀 내보고자 하는 내 의지를 담아 '저자' 정도로 불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업이 저자인 건 조금  이상하지만, 불리는 직업명이 굳이 내 존재를 규정한다고도 생각지 않기 때문에 더 솔직히 말하면 '독립 저술가(인디라이터)' 정도가 나의 부캐를 규정하는 명칭이 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해 보이는 어휘들을 쪼개고 갈라 가야 할 방향이 잘 보이도록 렌즈의 각도를 조금 수정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식으로 글을 쓰고 싶은가?


그린다고 다 그림이 아니요 부른다고 다 노래가 되지도 않는다. 뭐 실은 그림도 되고 노래도 되긴 하지만, 흥얼거린다고 다 가수가 되고 벽에 그린다고 모두 화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장르가 만들어지는 시대에 이러한 고민이 무에 필요할까 싶지만 화가에게도 화풍은 있고 가수에게도 음악성은 있으니 아직은 사소한 내 글 놀림이라도 쓰는 방식을 한 번쯤은 짚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글 속에 담을 나의 정서를 구분해두었으면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의 글에 통일감 있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정서가 내 화풍이 되고 음악성 되어 글쓴이로서의 내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며 나와 나의 글을 타인의 것들과 구분 지을 터이니 말이다. 그것이 자라 내 세계관이 되겠고 가치관이 되겠고 세상을 향해 던지는 내 시각이 되겠지. 족하고도 넘치는 바람이다. 이런 가치들을 앞으로의 글에 꾹꾹 눌러 담아보고 싶다.


먼저는 아름다움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아름다운 아침을 사랑하고 한가한 저녁을 사랑하고 종종거리는 엄마의 걸음을 사랑하고 포근한 침대를 사랑한다. 깊은 밤 들리지 않는 고요를 사랑하고 계절의 변화를 사랑하고 톡 쏘는 겨울바람을 사랑하고 시시각각 빛을 바라는 나뭇잎을 사랑하고 더위를 해갈시키는 바다를 사랑한다. 통찰이 있는 글을 사랑하고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사랑하고 서글픈 정서를 사랑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대문호의 작품을 사랑한다. 친구와의 울림이 있는 대화를 사랑하고 그 친구와 먹는 주꾸미 볶음을 사랑하고 가끔은 실수를 인정하는 친구의 아름다운 품격을 사랑한다. 얼기설기 꽉 찬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글쓰기를 사랑하고 재즈 트리오의 피아노 선율을 사랑하고 위트 있는 그림과 장르를 개척해내는 예술인을 사랑한다. 아름다움은 지친 세포를 잠 깨운다. 아름다움은 죽은 시간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 아름다움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부정한 것들을 씻어내 가슴을 들뜨게 해 준다. 그렇다. 아름다움은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가치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내 삶의 지지대다. 그래서 내 글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무심히 찌른 머리핀처럼 때로는 시간을 두고 고아낸 걸쭉한 사골국처럼 또 때로는 이보다 더 과할 수 없이 치렁치렁 걸쳐진 장신구처럼 내 글도 때를 따라 비추는 느낌을 달리하며 그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글 속에서 나는 보다 진실하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글을 집어 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추측컨대,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과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때때로 타인의 지식과 감성을 빌어 일상이 주지 못하는 정서적 갈증을 채우기 위함일 것이리라. 물론 때로 나처럼 필요한 정보를 얻거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참고 서적이나 잡지를 사듯 책을 집어 들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글이 주는 위안과 작가의 경험과 감정, 상상과 이상을 공유하려 글을 집곤 할 것이다. 그렇게 일상의 너비와 깊이를 격상하려 글을 택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독자로써 느꼈던 부당한 경험들, 즉 어느 유명 저술가가 제목을 갈아치우며 쉼 없이 쓴 자기 복제적 베스트셀러처럼은 글을 쓰지 말아야겠노라 마음먹어 두었다. 진실하지 못한 만남처럼 공허한 시간이 없고 진정성이 결부된 글처럼 유익하지 않은 것도 없기에 오직 책을 위한 글을 쓰지는 말자고 다짐해 두었다. 공감의 크기와 양은 결정할 수 없지만 다가가는 방식을 먼저 결정함으로써 나는 스스로에게 진실함으로 말미암아 내 사소한 글 나부랭이가 타인의 시간과 정성을 허비하도록 하는 없었으면, 하고 스스로에게 바란다.


나아가 나를 일으킨 수많은 글들처럼 내 글에도 생명이 있기를 소망한다.


생명은 죽은 것들은 결코 전달해줄 수 없는 생의 산물이다. 쓰는 사람 속에  생명이 없으면 그 사람이 내뱉는 언어도 결코 울림이 있을 수 없다. 현실이 나를 짓눌러 일상이 찌그러지고 감정이 부서질 때 먼저 길을 걸은 자의 아픈 마디마디들은 다시금 나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 속에서 생명을 마셨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글은 화분 하나 없는 숨 막히는 좁은 방안 겨우 틈을 낸 작은 창문처럼 우리를 숨 쉴 수 있게 한다. 답답한 머리를 틔우고 삶을 틔워 다시 걸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장르의 문제가 아니다. 시원한 생명력은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매일 쓰는 보고서에도 공식으로 꽉 찬 수학책에서도 생명은 살아 숨 쉴 수 있다. 진정성을 가진 콘텐츠가 아름다움을 덧입어 감동적인 차원으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종류가 무엇이든 울림을 줄 수 있다. 아프고 시린 경험이 될 수도, 적확한 표현이 될 수도, 잘 짜인 구조가 될 수도, 넘치거나 절제된 내레이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어떤 매개를 사용하건 생명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고유히 빛을 뿜어 읽는 사람과 함께 공감의 결을 만들어 내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공유하며 같이 숨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쓰다 보니 좀 거창해진 느낌이다.


생각이 나를 이끄는 대로 가자고 다짐한 후 도무지 진척이 없어 이러다 계획이 계획으로 끝나겠는걸, 하며 실망스러운 마음을 피우고 있었는데 매일의 시간 속에서 생각들은 떠다니는 파편으로만 머물지 않고 또 하나의 틀을 만들고 세워주었다. 피곤에 절은 바쁜 쳇바퀴 안에서의 나였다면 결코 얻어내지 못했을 것들이다. 조용한 나의 구간에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이는 이 조용한 침묵의 구간에 매일 집으로 출근하며 나의 시절을 성실히 건설하고 있는 나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같거나 비슷한 시간을 보낼 당신에게도 무한한 응원을 전한다. 어찌 됐건 오늘 우리의 비장한 각오가 내일의 글에서 꼭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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