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게 자고 싶은 겨울 날씨, 가만히 엎드려 고구마나 까먹고 있고 싶지만 그러기에 나는 너무 어른이지 않은가. 집에 콕 처박혀 마음대로 떠오르지도 않는 영감을 쥐어짜가며 해괴한 몰골을 하고는 하루 종일 글이나 쓰며 직업적 지위를 잘 유지하고 싶지만, 그러기에 12월은 흩날리는 눈발처럼 너무 설레는 달이 아니던가. 역시 나는 번뇌가 많아 도무지 성공이란 걸 해버릴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도처에 댈 핑계가 이렇게나 많으니 이로써 오늘의 꼬락서니를 유지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두어 달 진도를 나가는가 싶더니 12월 들어서면서부터 막힌 길목에서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시작한 방향에서 조금씩 벗어나더라도 다시 채워지는 색깔로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나가면 되는데, 그 지점 즈음에서 영감이란 놈이 딱하고 멈춰 버렸다. 전에도 성실하게 밥을 주고 얻은 것은 아니어서 요리조리 조리요리 잘 끌고 가면 되겠지, 내심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었는데. 무엇이 시발점이 된 것인지 어느 지점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서는 도무지 꽁무니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쓸데없이 시간을 죽이며 자폭의 나날을 보내지 않으려 밥이나 먹고 책이나 읽으며 자꾸만 붕 뜨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연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고개 들어 달력을 보니 섭섭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마지막 달 앞섶이 맥없이 풀어져 있다. 어느덧 12월은 한 해의 종말을 향해 한치의 속도도 늦추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차일피일 미뤄진 계획의 달성이 다소 부진하여 마음도 지진하다. 이 또한 과정이란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기엔 너무 순진했고 과한 여유를 부렸으며 핑계만 득실거리는 아까운 시간을 보냈음이 틀림없다.
'나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글을 쓰건 공부를 하건 일을 하건 늘 그 안에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있다. 태생이 싸움꾼도 아닌데 이렇게 피곤하게 매일 싸우지 않으면 좋으련만. 이 놈의 상대는 잘 보이지도 않아서 두 주먹으로 어퍼컷을 날릴 수도 들쳐업고 패대기를 칠 수도 후련하게 싸대기를 날릴 수도 없다. 가만 보면 소리 없는 전쟁 속에서 늘 나 혼자만 당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잔뜩 약이 오르지만 이 싸움의 진원지이자 전투지는 뻔하게도 나의 내면이어서 어디 달리 탓할 수도 없다. KO 직전 얼굴이 팅팅 부은 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게 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늘 그렇듯 앞으로 잽을 날리며 두어 발 앞으로 나가는가 싶더니 움찔움찔 뒷걸음질을 반복한다. 뭐 아직은 괜찮다. 나간 걸음에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현재는 복구 가능한 범위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시 이 쭈그린 움츠림의 구간을 치고 나갈 것인가?
방법은 단순하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으면 된다. 시간을 따라 부식하는 과거의 나태한 습관의 관성을 끊어 버리면 된다. 녹이 슨 자리는 홀로 그 자리만 상한 채 있는 법이 없다. 안락한 과거의 타성은 게으름을 먹이 삼아 잘고 너저분한 활동으로 시간을 의미 없이 갉아먹으며 하루에 좀을 더한다. 거친 시간의 등껍질에 긁혀 더 이상 피 흘리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방향을 돌릴 일이다. 다가올 쇼 타임을 고대하는 자라면 다시 승부의 고삐를 낚아 물살을 거스를 일이다. 그렇게 힘겨운 연습을 이어나갈 일이다. 훈련되지 않은 날들로는 결코 승부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희를 꿈꾸는 자는 늪에 빠진 자신의 발을 뽑아 서둘러 다시 일어서야 한다. 자의가 상실된 서커스의 코끼리가 아니기에 스스로를 채근해 부추길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지극히 사적이고도 개인적인 영역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멘털과 습관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된다. 아침 시간을 깨우며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다이어리에 적는 것만으로 습관은 획득되지 않는다. 사고의 체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의식의 영역이고 습관의 형성은 행동의 영역이다. 글쓰기의 경우, 부지불식 영감이 떠올라 저절로 숙성되기 만을 기다렸다가는 일 년에 몇 문장을 생산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눈품에 발품을 팔고 시간 속에서 생각의 무게를 조율해 관념을 깎아 작업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습관을 써 나가야 한다.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이 유(有)의 과정은 마침표를 찍기까지는 무(無)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지 않고는 모두 사장되는 생각 혹은 떠있는 관념 내지는 습작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 지망생의 필사적인 전쟁 구간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쓰기 습관을 형성하고 지속해나가야 하는가?
매일 3시간씩 10년을 투자해야 하는가?
동일한 루틴을 100번 반복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하루 1% 조금씩 꾸준히 변화하면 되는가?
전자의 노력은 관성의 힘이다. 관성이 습관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 계속된 탄력으로 새로운 관성을 만들어내는 선순환 법칙이자 놀라운 지속 가능 전략이다. 만일 모든 개인 작업에서 동일한 루틴이 발생할 수 있다면 이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먼 미래의 스스로에게 상상으로나마 바라보지만 그 시간의 법칙을 따르기에는 아직은 너무 초보다. 관성이 스스로 미는 힘에 다다르기 전까지 무언가 활용할 장치가 필요하다.
중자는(저자의 언어) 그럴듯하다. 100번쯤 반복하면 적어도 어렵지 않게 혹은 습관적으로 무언가를 생산할 수는 있다.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고 필요한 메일을 잊지 않고 보내며 가볍게 보고서 정도는 쓸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글쓰기는 조금 결이 다른데 글을 쓰는 일은 감정이 나부끼는 작업이어서 100번의 동일한 반복적 작업이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글은 영감을 기반으로 글의 품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루틴화 된 작업이 최선은 아닐 수 있다. 시간을 정해 책을 읽고 수학 문제를 풀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기 때문이다.
마지막 후자인 하루 1%씩 변화하기는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이유는 창작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다른 나 같은 사람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적용 가능한 모델이다. 창작자의 일용할 양식이 매일 동일하게 떠올라 준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서 숙제하듯 앉아 글을 생산해 낼 수는 없다. 이 얼마나 곤욕스러운가. 물론 1% 자기 관리는 모호해 보일 수도 있다. 미미하여 보잘것없을 수도 있다. 측량 가능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신의 변주에 변화의 노력을 의식적으로 가해 조금씩 구체화해간다면 이 변화의 노력은 머지않아 큰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스케치가 밑그림이 되고 채색이 되며 그러다 점점 작품처럼 보이도록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자꾸만 풀어지려는 느슨한 나를 다잡아 하루치 노력을 완성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오늘 이루어 낼 1%의 변화는 자유기고가의 지난한 구습을 벗고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쓰다만 묵혀둔 글의 몸통을 마무리 짓는 것이며, 너덜거리는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 오늘의 해야 할 일 목록을 해치우는 것이며, 프로젝트의 우선순위를 정렬해 느슨해진 고삐를 다시 잡아채는 것과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것쯤 되겠다. 이쯤이면 더는 완벽할 수 없는 오늘을 위한 1%의 노력되시겠다.
잠시 옆길로 새 이 기약 없는 시간들을 무엇을 하며 채워가야 하나 머리만 굴리며 영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게으름을 깔고 앉아 핑계를 대는 내 정신의 허약함을 보며 약간의 죄책감을 더해 출구 전환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다다른 결론은 스스로를 채근해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이미 진입로에 들어서 돌이킬 수도 돌아갈 엄두도 나지 않는다면 다시 풀어진 신발끈을 고쳐 매고 가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인생의 다음 장면을 힐끗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감독이자 주인공인 이 창작의 영역에서는 다음 장면을 그저 내가 그려 채색해야 할 뿐,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니 그려내지 않은 빈 종이에 미리보기란 없는 걸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스스로의 작업에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오늘의 변화를 완성해 나가기로 한다. 그리하여 느리게 느리게 기어가던 거북이도 결국은 종착지에 다다라 마침내 결승선을 산뜻하게 통과하는 해피한 결말을 스스로 한번 만들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