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카피 오리지낼리티
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건 한 달여 전쯤이다. 배운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실은 그림을 그리러 다니는 중이다. 아름다움을 탐미하려는 갈망이 늘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시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은 일종의 취미이자 내가 누리는 작은 사치다. 스케치부터 시작하기에는 가야 할 길이 너무 멀 것 같아 SNS를 기웃거리던 중 바로 페인팅이 가능한 참신한 클래스를 찾았다. 매일 집으로 출근하는 일은 무척 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정된 환경이 주는 지루함과 끝없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약간의 변화를 줘 보려던 참이었다. 그림 한 점 걸어두려 작품을 찾아보다가 코로나 붐을 타고 껑충 뛰어버린 작품 가격에 놀라 직접 한 점 그려보려 미술 학원을 가던 참이었다.
생기 충천하던 시절, 이곳저곳 여행하며 본 전시들은 늘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늘 고정된 대가의 위대한 작품도 좋지만 예술은 늘 변화하며 새로움을 만들어내지 않던가.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시작이 담긴 위트 있는 작품들을 나는 너무도 사랑한다. 내게 신선한 에너지를 제공하며 생동감을 입히기 때문이다. 오래전 떠났던 뉴욕 여행에서도 내 얼굴에 전례 없던 생동감을 입혀 준 곳들은 단연코 갤러리들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모마,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갤러리들의 소소한 전시까지. 전에도 후에도 나는 내 얼굴에서 그런 생기 있는 미소를 본 적이 없다. 거대한 웅성거림과 세포를 들뜨게 하는 흥분 가득한 에너지가 시절의 젊음과 만나 눈부시게 빛나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오랫동안 미술을 끌어당기던 나는 오늘에 이르러 이제 그림을 한 점 가져보아야겠다는 욕망을 가지게 됐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작품을 보는 눈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추구하는 회화의 방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런 그림들을 스크랩하며 온라인으로나마 작가의 활동들을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술 신생아로서 나는 어떤 그림을 좇아 다니는가.
선과 사물이 사실을 지겹게 덧입은 그림은 내 선택에서 제외다. 인간의 추한 본성을 치열하게 파고들어 온통 어두움으로 캔버스를 뒤덮은 작품도 내게는 열외다. 내게 회화는 즐거움이며 유희고 창의력이자 일상의 위트며 단순함 속의 정렬된 구조이자 색채의 마법이고 아름다운 조화며 독자성이다. 그림을 찬란하게 표현할 말들은 파도 파도 끝이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무 그림이나 사랑하지 않는 나는 현재 치열하게 나의 취향을 형성해나가고 있는 컬렉터를 희망하는 풋내기 미술 애호가쯤 되겠다. 글을 쓰면서 엉킨 실타래가 풀리 듯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걸 보면 나는 대략 그림과 합이 맞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그림은 설렘이고 흥분이며 대학 시절 잘 생긴 남자 친구고 내 눈을 훔치는 색색의 씬 스틸러다.
이렇게 그림을 사랑하는 그러나 전혀 그려볼 생각은 없었던 내가 그림을 그리러 가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림이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다. 너무 비싸다는 표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작가의 작품들이 코로나 이전보다 훨씬 비싸진 건 사실이다. 추측컨데, 코로나를 거치며 어디로 향할지 몰라 당황하던 고삐 풀린 자금들이 미술 시장으로 대거 유입되며 작품 가격의 폭등을 가져왔고, 시류에 의해 나처럼 매일 집으로 출근하거나 의도치 않게 집에서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된 대중의 니즈가 미술 시장의 확장을 불러일으키며 그림 가격의 상승을 부추긴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미 상업적 계약을 마친 그림들은 많은 사람에게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며 널리 퍼져 손쉽게 공유 가능하지만, 값싼 물건이 반짝 수명을 다하고 쉽게 버려지듯 복제품의 감동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 내 주관적 견해이다. 그래서 약간의 유동 자금으로 맘에 드는 그림 한 점 사서 걸어볼까 했던 나는 작품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져 손수 그림 한 점 그려 보겠노라 화실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다.
시내 한가운데 아직 철거되지 않은 낡은 주택에 위치한 아뜰리에는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직한 라운지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는 곡은 카를라 브루니뿐이었지만 어딘가 주인장의 힙한 정서가 묻어나며 어색한 듯 묘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한마디로 기분 전환이 된 셈이다.
첫 수업이 있던 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공유해 달라는 주인장의 문자를 받고 휴대전화에 스크랩해 둔 여러 작가들의 그림을 살펴보았다. 만지면 부순다는 망손의 별명을 가진 내가 과연 그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지만 어쨌든 휑한 벽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이미지 몇 개를 추려 화실로 갔다. 그 중에서 내가 선택한 그림은 단순한 구조의 형체 속에 검은색이 채색된 이보다 더는 단순할 수 없는 추상적 그림이었는데, 나는 선 긋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그날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원래도 미다스의 손이었지만 수업 시간이 다 가도록 선 하나를 제대로 못 그려 나중에는 캔버스가 너덜너덜해졌다.
'아, 이토록 어려운 것이었다니!'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그냥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닐 것을.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갈아내 고군분투해 반복과 조련을 거쳐 마침내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됐을 것을. 창피하고 부끄럽게도 낮춰 보며 간과한 것이다. 따라 그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어 보여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이었데, 그어도 그어도 원화와 모양이 같아지지 않았다. 근 두 시간여를 소모했음에도 나아지는 바가 없어 빈 손으로 수업을 끝내야 했다. 주차권도 챙길 겸 적잖이 당황한 기분도 추스를 겸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두고 테이블에 앉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판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작을 하는 일은 정당한 일인가?'
'중견 작가도 되지 않을 저 어린 신진 작가의 재기 발랄한 위트를 마치 어느 갤러리에서 구매한 것처럼 정성스레 카피해 내 집 벽을 장식해도 괜찮은 것인가?'
'작가의 저 심플한 선과 색을 직접 재현해낸 나의 창의력 없는 재능을 기뻐해도 되는가?'
'그렇게 복제된 회화를 보며 심미안적 만족을 누려도 되는가?'
이런 질문이 떠오르자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어딘가 조금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단순하고 위트 있는 선을 그리기 위해 어릴 적부터 수없이 캔버스를 그어 댔을 어린 작가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그의 재기 발랄한 위트를 훔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언젠가 한 번은 텔레비전에 나가지 않을까 하여 스스로 새겨둔 생각이 있었다. 어떤 일에 대한 정당성. 물론 꿈꾸던 날은 오지 않았고 지금은 시시해 그런 생각에 흥미조차 없지만, 적어도 남의 것을 훔쳐 부끄럽게 찬란한 시절을 만들지는 말자는 생각이 저면에 있었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으니 어제 있던 것이 오늘도 있고 모든 예술의 주제도 시대를 달리하며 반복되지만 새로움의 한 끝을 가르는 건 기존에 없던 시각이요, 고유한 해석의 방식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대중의 호흡을 입어 희소성 있게 거듭나며 작품의 영역으로 격상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정당성의 토대 위에 작가의 고유한 퍼스낼리티가 더해져 작업물의 독창성, 즉 오리지낼리티가 장착되는 것이다. 독창성이 어딘가 작업물의 독특한 창의력에만 강조점을 둔 느낌이라면, 오리지낼리티는 작업자 고유의 특성과 개성, 본연의 고유한 성질이 창작자를 통해 더 잘 드러나는 느낌이다.
다 식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벽 면에 걸린 포스터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유명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아트 프린트로 만들어 걸어둔 장식품이다. 인쇄물 속 문구가 작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WHY, BRAD DARLING, THIS PAINTING IS A MASTERPIECE! MY, SOON YOU’LL HAVE ALL OF NEW YORK CLAMORING FOR YOUR WORK!”
“왜 그래요, 브래드, 이 작품은 걸작이에요! 곧 온 뉴욕이 당신 작품으로 떠들썩거리는 모습을 보게 될 거 라구요!”
무명의 작가와 무명의 화가, 무명의 음악인이 자신의 서툰 기술을 오늘도 연마하는 이유. 한 끗 다른 결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이름 없이 견디는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 그 무수한 깨어짐의 반복 속에서 아름답게 발견된 단순한 선 하나를 의식을 거치지 않고 모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바로 그 이유가 오늘 내가 모작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요, 나를 골몰하게 만드는 동기이며, 나의 미래의 대중에게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내 작업의 정당성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