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관점을 갖고 싶어
나는 매일 집으로 출근한다
청춘이 뭉개 구름처럼 피어오르던 시절, 나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대략 고등학교 때부터였던가! 시험이 끝나면 엄마를 졸라 용돈을 받아서는 멋 좀 부리는 뒷자리 친구들과 곧잘 시내로 나가곤 했는데 이유는 옷을 사기 위해서였다. 휴대폰도 디지털카메라도 없던 시절이라 추억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아마 변두리 여고생의 미(美)에 대한 동경은 매장에 갓 들어온 흰색 구두와 몸매가 드러나는 로고 청바지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더 열심히 멋을 부려 획이라도 그어볼까 싶지만, 주머니 사정도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그제나 이제나 학교가 좋아하는 학생은 정해져 있으니 그럴 배포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찌 됐든 시절은 까마득 지났고, 켜켜이 쌓인 시간으로 나는 취향과 안목을 얻었으니 후회할 필요는 없겠지.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리며 줄기차게 공부만 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볼 때가 있지만 용돈과 아르바이트비를 쪼개 열심히 멋 부린 일은 이후 내 삶의 방식이나 기호,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오늘의 내 모습을 만든 과거의 그 작은 사치스러운 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밤낮 패션 잡지를 뒤적이며 한 끗 다른 이들의 착장을 흉내 내며 시간의 틈을 촘촘히 보냈으니 이 정도면 얕은 덕질은 된 셈.
시간이 흐르고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뒤로 옷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집으로 옮겨갔다. 켠켠이 놓인 그릇이나 가구, 가정용품들로 미에 대한 애착이 바뀐 것이다. 외국 여행이라도 가는 날엔 그곳 정서와 색이 묻은 물건들을 찾아내느라 열심히 발품을 팔았고, 그런 관점은 시간을 타고 이어져 이제는 가끔 그림을 보거나 가구를 구경하며 눈의 허기를 채우곤 한다. 욕망의 작은 노예로 충실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나의 사사로운 물건들과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며 생활의 편리뿐만 아니라 심미안도 충족시키고 있으니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터. 일상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생에 대한 나의 신조가 공간 속에서 피어나며 생활과 작업의 갈증을 말없이 달래주고 있다. 결코 무심히 만들어지지 않았을 창작자의 오브제들이 내 공간에서 나와 함께 공존하며 서로의 가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조용한 시너지를 일으키며 영감을 주고 내면의 색을 다채롭게 만들면서 말이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옷을 고르고 물건을 탐하며 오롯이 혼자 즐겼던 사적인 시간의 달콤함은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꼭 필요한 애착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옷과 구두에 마음을 뺏기며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여학생에서 다른 이의 관점이 살아 숨 쉬는 가구나 물건을 신중히 고르는 여성으로 시간과 함께 진화했다.
글을 쓰는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러한 선택의 취향은 책으로도 선명하게 이어졌다. 다독을 하는 편은 아니지만 삶에서 주저하는 순간들을 만나거나 고견이 필요할 때, 혹은 어딘가 휑한 머릿속을 다른 이의 시각으로 풍요롭게 채우고 싶을 때 나는 책을 산다. 전자책보다는 지류 서적이 좋고 가끔 가는 서점에서의 탐색적인 시간도 좋아한다. 그럼에도 인생에 늘어뜨려진 키워드들을 해결해야 하거나 다소 새로운 전환이 필요할 때 주로 책을 구매하는 곳은 온라인이다. 지금도 내 장바구니에는 자기 계발서에서부터 디자인 서적에 이르기까지 수십 권의 책들이 담겨 있다. 선택과 구매는 늘 비용 문제를 동반하고 또 산다고 다 읽는 것도 아니어서 요즘에는 책 구매에 더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그러고 보니 살아가는 모든 활동이 보고 고르고 결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식탁 위에는 예닐곱 권 가량의 책이 포개어져 있지만 과연 몇 권이 나에게서 살아남아 서고에 꽂힐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고심 끝에 구매하더라도 읽다가 접어 버리는 책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지류들은 대부분 중고 서점에 헐값에 팔리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아파트 재활용으로 그냥 버려진다. 물론 값어치를 능가하는 귀한 가치의 책들은 좁은 서재의 벽을 채우며 나와 함께 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책들은 읽히고 폐기되는 수순을 밟겠고.
그렇다면 폐기와 간직의 한 끗을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가지고 있던 책들과 내용이 중첩되거나 재미가 없으면 폐기된다. 저자의 이름이 무색하리 만치 밋밋한 내용의 서적도 폐기된다. 또 작가의 난해한 정신세계가 나와 결을 달리하며 나의 세계관을 오염시킨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도 책은 폐기된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어 지식과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더 이상 서고까지는 차지할 필요가 없는 경우, 책은 지인들에게 나누어져 공유된다. 나름의 선순환인 셈이다. 구구이 폐기되는 이유를 나열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선택이자 취향일 뿐 각자에게 인정받는 책의 기준은 모두 다르다. 대중에게 인정받는 작품이 내 서고나 벽면을 차지하지 않는 일은 어떤 옷을 선택하는가에 대한 나의 개인적 취향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눈먼 구매자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이름 있는 브랜드 제품이라도 쓸모나 가치의 유용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책을 구매하고 간직하는 이유도 옷을 고르는 일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그러니 이름 높은 작가의 작품일지라도 중고 서적 판매 목록에 오르락할 수 있고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의 글이라도 누군가의 서고에서 고전처럼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봄 잉크 냄새마저 휘발되어 퀴퀴하게 좀 먹은 책들을 정리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글로 돌아가,
올여름이 꽁무니를 감추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아트 피스(art piece: 예술 작품을 이르는 말)들은 다음과 같다. 꽃을 노래하며 마알간 생의 얼굴을 순결하게 읊은 시인의 작품, 생을 지렛대로 들어 올려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준 미국 작가의 자기 계발서, 또 죽음과 사투하며 통렬한 지혜를 여린 서사에 담아 거침없이 휘두른 위대한 지성의 마지막 저서, 그리고 흑백으로 어둡던 시절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형형의 색들로 한국의 선을 펼친 모던보이의 사랑 이야기, 거기에 생의 아픔을 빛나는 보석으로 승화시켜 삶과 영원 사이에서 지혜와 통찰로 빚어낸 작가의 서(書)이다. 모두 아름답기 그지없고 음악으로 표현하여도 장르가 다 다를 테지만 저마다의 빛나는 통찰과 사사(私私)로운 관점이 빛나는 귀한 작품들이다. 이런 글들은 자체로써 빛이 나고 장르에 상관없이 깊은 만족감을 준다.
독서로 돌아가,
글을 읽다 보면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줄을 쳐 가며 스스로 읽어야 하는 글도 있고 글 자체가 눈과 심장에 박혀 곱씹히며 두고두고 읽히는 글도 있다. 두 가지 모두 깊은 내적 만족을 주지만 희열과 카타르시스를 퍼붓는 글은 주로 후자의 경우이다. 말할 수 없는 고유한 지성과 감성, 작자의 관점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며 한 끗 다른 필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그 속에서 요동치게 한다. 글이 지나는 것이 아쉬워 아끼고 사리며 문장들을 읽는다. 글은 물결처럼 지성을 반짝이며 좇을 수 없는 사유의 세계로 나를 끌어당겨 허를 찌르듯 내 머리를 관통해 옷깃처럼 펄럭인다. 읽는 나를 압도한다. 작자의 퍼덕이는 관점이 나를 요동시키며 경외의 감정을 솟게 한다. 그런 책이야말로 유명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격을 높이며 내 작은 서고에 꽂혀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펜대의 매력이 읽는 이를 통해 주위를 물들이며 사사로이 예찬받는 것이다. 그들이 보았던 사물과 사람, 시간과 사건의 사사(私私)로운 관점이 미지의 세계관을 열어 범인(凡人)을 초청하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 관점이 평범과 비범을 가르는 날카로운 한 끗이 되어 인생을 가르고 시대와 세태를 쪼개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압도된다.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자취를 더듬고 작업을 상상하며 아무도 허락한 적 없는 제자의 마음결을 갖추어 스스로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위대한 스승들을 나의 사적인 서고에 모시면서.
나도 그렇게 글이 쓰고 싶어졌다.
지금 쓰는 글은 도무지 어떤 장르로 무슨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펜이 스스로 미는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감히 그런 식으로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들의 비범하고도 탐스러운 사사(私私)로운 관점을 욕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추려 장바구니에 고이 담아 결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 어느 한 곳에 깊숙이 새기며 감각들을 깨워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축적할 수는 있는 것이다. 작가의 유전자를 흠앙하며 범인으로 배워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허락한 적 없는 제자도의 길을 홀로 걸으며 나를 탈바꿈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경험은 습성을 축적해 취향을 만든다. 취향은 그 사람의 스타일이 되어 색으로 드러난다. 그 색은 다시 본질이 되어 사사(私私)로운 관점을 뿜으며 삶을 재생산한다. 누군가는 붓으로 누군가는 옷으로 누군가는 펜으로. 그러니 한없이 사사(私私)로운 관점이야말로 이 얼마나 중요한가. 사사롭디 사사(私私)로운 관점으로 평범한 일상을 갈라 이야기를 길어 올릴 일이다. 모든 예술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던가. 사사(私私)로운 생의 모든 행불행의 서사들이 사사(私私)로운 해석의 옷을 입어 미(美)를 달리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운명이 초가을 바람을 타고 스치는 이 밤, 눈물겹게 갖고 싶은 내 인생의 아이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사(私私)로운 나만의 관점이 아니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