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신의 꿈과 계획을 성취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까?
어디서 읽은 적이라도 있다면 견주어 비교라도 해볼 텐데, 한 번의 꿈을 실패하고 또 한 번 꿈을 그리는 지금도 정확한 통계는 알 수가 없으니 꿈이 어느 자리에서 얼마큼 와 있는지 정확히 가늠할 수는 없다. 다만 허무하게 지난 자리를 바라보며 쓰라리게 마음을 움키던 시간을 기억할 뿐. 아로새긴 실패의 흔적을 흉터처럼 간직해 느슨해지려는 찰나 스스로 고삐를 조이며 채찍질할 뿐이다. 시절이 악하니 세월을 아끼기를 바라면서.
통역 대학원에 입학했던 이유는 학위를 추가해 전문성을 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통사와 어법, 문학과 계속해서 싸워야 하는 지루한 영문학은 원래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진로를 수정해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해보려던 나의 시도는 먼저 시작한 승무원 후배에 의해 좌절되었다. 계급장을 따거나 인맥을 넓힐 목적이 아니라면 별 쓸모가 없을 것이라며 그녀가 만류했기 때문이다. 전공을 택하느라 삼사 년을 고민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호감을 갖고 있던 대학에 통번역 대학원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거리는 좀 멀었지만 재미있어 보였달까?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마감일이 되어서야 겨우 원서를 접수했다. 그 시절 나를 좀 회고해보자면, 접수 마감일까지 지원을 미뤄 부랴부랴 남편을 포항까지 달려가게 한 게으름뱅이인 데다, 무슨 일이든 재주와 재능으로 척척, 그러나 야무지지는 못해 늘 능력이 날개를 뻗치다 접어버려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인간형이었다. 그러니 간절한 성공이나 쓰라린 좌절에 대한 진폭도 크지 않았을뿐더러 늘 절반 가량의 역량만 사용하며 좁은 진동 범위 내에서만 살았던 듯하다. 동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본이 될만한 롤 모델도 없기도 했고 또 그다지 여유를 부릴 만한 환경이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는 맺음이 무른 내 성격과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관대해 일정 치를 넘으면 쉬이 합격을 줘버리던 유약한 나의 태도가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운은 좋았는지 면접에서는 족족 붙어 불운한 시절 취업운만은 빛을 발해주었는데, 대학원 면접과 실기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르바이트를 포함한 모든 면접에서 거의 떨어진 적이 없던 나는 학력을 상쇄할 순발력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운이 좋아서였는지 부족한 준비에도 불구, 대충 치른 면접과 실기 시험에 단번에 붙었다. 늘 그랬듯 코 앞으로 다가온 면접을 앞두고 며칠 여기저기 블로그를 긁어 실기 문제들을 훑은 후 기치를 발휘해 시험에 집중했을 뿐이데 떡 하니 합격한 것이다. 물론 학생이 귀한 요즘 같은 시절에 대문 활짝 열린 대학원 입학 소식이 뭐 그리 대수겠냐 마는 갈팡질팡하며 여러 해 미뤄둔 계획을 성취하였으니 어찌 됐건 그 자체로 나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흔 하고도 한 살의 포문을 연 나는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어리고 점잖은 다섯 명의 싱그러운 동기들과 매일 내 인생을 천국과 지옥으로 내동댕이치던 통대(통역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생활은 빛과 어둠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그 시절이 천국일 수 있었던 이유는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이 너무도 호인(好人)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하며 스스로 참 인복(人福)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유야 모두가 아는 것처럼 뒤통수를 맞기도 모함을 당하기도 시기 질투에 휩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말고도 인덕(人德)이 없다고 여겼던 이유는 구구절절 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적당히 덮기로 하고. 대학원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뭐랄까 다들 한 가지 독특한 부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속에 순수함이 보석처럼 빛나는 영롱한 친구들이었다. 너무도 지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허술한, 강인한 어깨 너머로 사랑이 용암처럼 들끓던, 머리를 휘날리며 검을 휘두르듯 매서운 실력을 뽐내던, 보랏빛 후드 티셔츠 속 도도한 지성이 빛나는, 그리고 순수한 젊음이 해처럼 붉게 이글거리는 순진하지만 한 끗이 있는 그 친구들과 나는 행복하게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약간의 독특한 영롱함이 평범을 비스듬히 비켜가는 나의 개성과 묘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며 그럴싸한 우리만의 무늬를 만들었다. 조금씩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는 친구들이었지만 인성이 빛나 허물마저 가려지는 귀한 친구들이었다. 이야기가 이렇게만 끝나면 좋을 텐데 삶은 늘 다른 얼굴을 함께 드리우기에.
준비되지 않은 대학원 생활은 그야말로 헬(hell 지옥)이었다. 실력이 좋은 친구들을 빨리 따라잡지 못하는 건 준비치 못한 역량이니 부럽지만 견딜 만했다. 어차피 각자의 강점이 달라 통역을 잘하는 친구들은 번역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영어가 유창한 친구들은 한자(韓字)가 많은 한국어를 유난히 어려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통역 주제는 원래 관심조차 없던 분야여서 국방, 외교, 안보, IT, 기후, 에너지 등의 쟁점을 어휘를 씹어가며 머릿속에 쑤셔 넣는 일은 정말이지 고된 활동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준비 없이 헐렁하게 입학한 날라리 아줌마의 학업 과정이 순탄했을 리가!
입학 후 첫 한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잡지 읽는 거 좋아하세요?”라는 교수님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한 나는 최근 무슨 잡지를 읽었냐는 교수님의 연이은 질문에 “모닝 캄(morning calm 대한항공 기내잡지)입니다.”라는 어이없는 답을 해 모두를 실소에 빠뜨렸다. 적막한 분위기 속 탄식을 금할 길 없던 나의 황당한 답변에 방황하여 갈 곳을 잃은 교수님의 눈동자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 타임(TIME)이나 이코노미스트(ECONOMIST) 같은 시사 잡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텐데 과년한 학생의 무지한 답변은 정말 웃픔 그 자체였다. 이전까지 나는 그만큼 시사에는 관심이 없던 _ 나의 세계를 벗어나 온갖 탁상공론이 난무한 복잡한 세상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_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굳어가는 머리는 열외로 하더라도 온갖 어휘를 외워 기호화하며 나의 지력, 체력, 청력과 싸워야 했던 일은 당연히 고달팠을 수밖에. 동기들이 아니었더라면 또 늦은 나이 중도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신념이 없었더라면 나는 결코 그 과정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 년에 두어 번 동기 모임을 하며 가끔 회상하곤 한다.
"이건 10억 정도는 받고 시작해야 하는 공부지, 암."
그럼에도 진흙 더미 위에서 굴렀던 그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 근육을 만들어 주어 우리는 쏟아낸 눈물만큼 그리고 서로를 향한 혹독한 비평만큼 그 길 위에서 스스로를 좀 더 단련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짓누르는 또 한 가지 괴로움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의 진로 문제였다.
일단 통번역을 시작했으니 그 길로 가기는 가야 했다. 그런데 어떤 강사나 교수도 내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물론 모호한 희망을 피워 주기는 했다. 순진하게 믿고 따랐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이유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한 이도 거의 없었거니와 통번역사들이 졸업 후 밟는 코스에서 나는 이미 나이로 열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 졸업 후 대부분의 학생들은 정부 기관이나 관공서, 혹은 국내외 기업의 통역사나 에디터로 지원하여 채용되는데, 일단 나는 직장 생활을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조직에 종속되어 시간을 보내는 삶은 이미 종료했음이라고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도 나이였지만 어려운 공부를 무지하게 시작해 부담감에 사로잡혀 주말마저 맘 놓고 쉴 수 없었던 그 생활을 더는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방송도 잠시 겸하고 있던 터라 몸은 늘 쉴 새가 없었고 마음은 죄 헝클어져 매일 인생이란 모진 아이에게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공부를 왜 하고 있는지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날로 커져만 갔다. 동네방네 대학원 다닌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중간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길을 확신에 차 걸어갈 수도 없었다. 학업에 무게를 더해 극심한 내적 갈등이 나를 더 갉아먹었다. 아는 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또 했지만 희망을 삼을 만한 선례가 없었고 하던 일을 계속하려 이 고된 길을 걷기에는 동기가 너무 부족했다. 무엇이든 성과를 내지 못하는 투자는 소용없는 일이라 여겼기에 마음 저 편에서 온갖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렇다면 방송은 왜 하는 것일까?’
질문은 거기서 이어졌다. 공고가 눈에 띄었고 나는 흥미롭게 언제나처럼 시도했을 뿐이다. 다행히 첫 시험에 운 좋게 채용이 되어 말도 안 되는 늦은 나이에 새내기 프리랜서 아나운서 타이틀을 달던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아나운서라기보다 라디오 진행자였다. 두 시간 진행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지만, 재능이 있었던지 매주 꾸지람과 칭찬을 번갈아 들으며 나는 단시간 급속히 성장했다. 인기 없던 주말 오후 교양 프로그램에서 정오 프라임 타임 진행자로 빠르게 자리를 옮긴 것이다. 직업이 될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았지만 그러기엔 지역이 멀어 물리적 부담을 무시할 수 없기도 했고, 유류비와 톨게이트 비용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어 낮은 보수를 계속 받으며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남들은 라디오 진행자라며 추켜 세워주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만족감이 가장 낮은 시간이었다. 그러니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계속해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이 계단을 타고 올라가 경력으로 이어질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학기 중에도 방학 중에도 골똘한 생각이 이어지며 머리를 싸매는 시간도 늘어났다. 고민의 날도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중 우연히 실습을 간 UN 행사에서 ‘유레카’를 외칠 만한 일을 발견했다. 드디어 고약한 운명의 사자가 베일을 벗고 우아한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웰컴 투 디스 써드 글로벌 콘퍼런스. 굿 모닝, 마이 네임 이즈 지나 리, 디 엠씨 포 투데이즈 이벤트.”
“제3회 글로벌 회의에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 환영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행사의 진행을 맡은 지나 리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화사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한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말하며 행사의 진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고민과 번뇌에 휩싸였던 모든 시간들이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나의 울분에 찬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만 같았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길을 찾았으니 이제 ‘고’를 외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직진했고 2학년 여름 방학이 되자 인터넷을 뒤져 서울에 있는 국제 행사 아나운서 양성 과정에 등록했다. 나이에서 오는 핸디캡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더는 시간을 지체시키고 싶지 않았다. 아카데미 수료와 동시에 데뷔 기회를 보장해 준다는 에이전시를 찾아 등록한 후 두 달 여간 서울을 오가며 점점 힘 빠지는 몸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힘껏 밀어붙였다. 기본 발성부터 행사 애드리브까지 필요한 기술들을 속성으로 익히며 꿈을 향한 애틋한 시간을 갈고닦았다. 마음은 설렘과 환희의 폭죽을 터뜨렸지만 몸은 왠지 자꾸만 가라앉으며 경고음을 울렸다. 누워 있는 날이 조금씩 늘어났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눈앞에 고지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의 정점을 더는 미룰 수 없으니 그깟 신호쯤은 충분히 묵살될 만했다.
내일 저 무대의 주인공은 반드시 '나'여야만 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