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 홈쇼핑에서 산 블렌더로 탄산수에 과일과 레몬을 넣어 아침 운동을 마친 남편에게 한 잔 주었다. 디톡스를 하고 있다는 모 여배우의 레시피였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먹은 그릇들을 식기세척기로 돌리고 샤워 후 젖은 머리도 드라이어로 말렸다. 핸드폰을 보니 최저 기온이 10도로 뚝 떨어졌다. 일교차가 커지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다. 이러다 가을도 어영부영 갈 모양이다. 농익은 가을볕을 놓치는 게 아쉬워 제주도 행 비행기표를 검색해본다. 집을 구하진 못했지만 계절을 돌며 충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바다에 몸 한 번 담그지 못하고 다 가버린 여름이다. 무더웠던 지난날이 청춘처럼 아련하다. 대학 새내기던 그 해 이후 올여름이 최고로 더웠다고 하니 구형 에어컨마저 없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무탈했던 계절에 감사. 오후엔 차를 몰고 아버지 농장에나 잠시 다녀와야겠다. 정성껏 가꾼 상추와 채소를 뽑아 동생네와 고기를 구워 먹을 생각이다. 조카도 온다고 하니 꼬맹이에게 그림이나 하나 그려 달라고 해야겠다. 손재주가 있어 무엇이든 예쁘게 척척 그리는 재주 많은 아가씨다. 얼굴을 슥- 만져보니 찬 공기 탓인지 피부가 푸석거린다. 화장품을 바르고 탄력 재생 기기를 켜 얼굴에 꾹꾹 문지른다. 효과가 있는 듯하다. 기사를 훑고 있노라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배우와 유명 감독이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력을 받아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눈길을 멈춰 조력을 받는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다 가졌을 텐데…’
‘많이 고통스러웠나?’
‘허무했던 걸까?’
몇 해 전 보았던 블록버스터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인간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지며 기괴한 파티 장면처럼 죽음이 연출된 총격 씬이었다. 아주 즐겁고 아주 가볍게. 그 장면을 보고 한참 생각했다. 영화가 말하는 생사에 대해서, 기술의 진보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인터넷 창을 닫고 SNS를 열었다. 간 밤에는 누가 어떤 피드를 올렸을까. 흠앙하는 작가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인테리어 크리에이터들의 픽과 화가들의 전시 소식은 내일의 집과 작업을 꿈꾸게 한다. 심각함이 사라지고 비로소 즐겁다. 마음이 기쁘다. 영혼이 행복하다. 작동하던 디바이스가 삐삐- 종료 음을 울리며 깜박거린다. 슬슬 하루를 시작해보아야겠다.
우리 삶은 기술과 문화의 집합체다. 기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나야 그저 삶의 편의가 필요할 때 기술을 사서 활용할 뿐이지만 기술이 인간 삶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건 사실이다. 집안에 있는 가전제품이 그렇고, 글 쓰는 노트북이 그렇고, 자동차가 그렇고, 곧 구매할 사과 그림이 있는 패드가 그렇고, 전기가 그렇고, 비행기가 그렇고, 모두를 연결하는 인터넷이 그렇고, 피부 미용 기기가 그렇고. 더 늘어놓아 무엇하랴! 기술이 우리 삶의 외형을 강력히 견인하고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생각해보면, 부싯돌로 불을 만들고 돌을 갈아 칼과 그릇을 만들어 쓰던 선사 시대의 어느 헐벗은 이부터 복잡한 체계를 초소형 반도체에 담아 태블릿과 휴대전화 안으로 쏘옥 집어넣은 진보적인 이까지 기술로 인류를 진보시킨 이들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당신의 노고가 인류 발전에 심각하게 이바지했노라 말씀을 전하고 싶다. 물론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기술이 본래의 목적성을 잃고 타락하여 활용되기도 하지만 기술 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다 언급할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내 경우, 기술의 역할을 도구로 한정 지으며 기술이 지배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불안하게 잠식되지 않기 위해 작은 노력을 기울인다. 인터넷 사용량을 조절해 필터링되지 않은 무분별한 정보들이 내 머릿속을 휘젓는 걸 막고 지나치게 기술에 의존함으로 인해 육체가 너무 나태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몸과 마음이 기술의 현란함에 과도하게 매혹되면 의식이 힘을 잃기 때문이다. 난무하는 정보와 중독된 습관이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가치관을 흔들고 편리함에 도취시켜 생산성 없는 기쁨으로 현실을 좀먹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전의 양면이 있겠으나 기술이 기술로써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만큼만 내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나는 기술을 제한시키는 편이다. 어떤 것이든 올바른 프리즘을 거치지 않으면 변질되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발달한 기술 덕에 인간이 존엄을 잃고 목적성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복잡한 부분이다.
십 수년도 전이다. 갓 결혼해 서울에 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당시 여러 기업에 출강하며 영어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아니 시즌 별로 여러 직군의 사람들을 만나 수업하는 게 재미있었다. 근무해본 적이 없는 대기업에 들어가 사내를 엿보며 여러 주제를 두고 아침저녁으로 토론하는 일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일 년쯤 지날 때였을 것이다. 스피킹 수업이 너무 뻔한 루틴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 모 대학에서 진행하는 6개월짜리 테솔(TESOL) 과정을 신청했다. 교수에 대한 이론과 티칭 스킬을 가르치는 과정이었는데, 경력이 많던 나로서는 이해하기도 쉽고 유익하여 온몸으로 내용을 흡수했던 듯하다. 여러 가지 이론과 실제 활용 가능한 많은 학습 기술들을 익혔는데 기억에 남는 이론 중 한 가지가 바로 ‘학습자 중심 수업’이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교수자 중심 수업(Teacher-Centered Class)이 아닌 학습자 중심 수업(Student-Centered Class)이 과목의 골자였다.
주입식 교육으로 반쯤 학교 생활에 부적응했던 나에게 그 수업의 접근 방식은 매우 신선했다. 교사가 수업에서 주어진 테스크를 처리하며 학습 시간 내내 혼자 떠들고 설명하는 기존의 학습법이 아니라 학습에 필요한 여러 가지 틀과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수업 내 상호 작용(Interaction)을 증폭시켜 인풋의 흡수뿐 아니라 말하기 능력을 배가시키는 방식이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했을 때도 매우 효율이 높아 과정 수료 후 학생들의 만족도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존의 방식을 뒤엎은 혁신적인 접근이었다. 혁신적이라기보다는 올바른 방식과 방향성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작금의 과학과 기술이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내가 다 논할 수 부분은 아니다. 기술의 진보야 말로 문명을 혁신하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편리를 가져왔으니 효용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지도 모른다. 노트북을 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필을 쥐던 손이 자유롭고, 중지의 굳은 살도 사라졌으며, 연필 깎는 수고로움에서도 나를 구제해 가상의 페이지에 글을 쓰게 함으로써 삼림의 훼손까지 막아 주었으니, 기술을 예찬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동의하는 바다. 다만 넓은 의미에서 인문학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 볼 때, 나는 우리 삶이 기술에 너무 많이 편입되어 개인이 역량과 가치가 힘을 잃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기술이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하고 생산성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이 변질되어 인간을 하등 하게 다루기 시작할 때 나는 더 이상의 기술적 진보는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번의 산업 혁명을 거치며 증기와 전기, 우주적 연결망 속에서 모든 사물이 인공 지능으로 연결되는 IoT(Internet of Things)의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뭐랄까 수명이 길어지고 삶이 편리해진 대신 인간은 점점 더 방향성을 잃고 부유하는 느낌이다.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불편한 유익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개인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는 느낌이다. 씁쓸하다. 기술과 개인 중 어느 것이 우등한가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면 얕은 금전 주의자는 기술을 택할 것이고 나와 같은 근본주의자는 사람을 택하겠지만 인간의 실존적 의미를 되짚어 볼 때 개인이 조금 더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삶을 지속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말해 기술에 잠식되지 말고 기술을 활용해 우리 각자의 역량을 조금 더 끄집어내었으면 하는 바람. 꼰대 아줌마의 뇌피셜 일지도 초보 예술인의 허세일 지도 모르겠다.
짧게 본 바에 의하면, 나는 요리를 싫어하지만 글쓰기를 좋아하고, 아버지는 아이디어가 많고 손재주가 많으시다. 반면 엄마는 강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많은 일을 처리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남편은 사람과 네트워크를 잘 형성해 마음먹은 일을 곧게 해낸다. 이 뿐 아니다. 귀엽고 깜찍한 나의 조카는 사물을 섬세히 관찰해 그림을 위트 있게 그리며 그녀의 엄마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지혜롭고 긍정적이다. 여동생은 시세를 보는 눈이 있고 추진력이 뛰어나며, 패션 감각이 좋은 남동생은 SNS에서 인기가 많다, 우경은 그 누구보다 큰 꿈을 꾸며 지치지 않고 나아가고, 순영은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만의 에너지로 작은 조직을 지속시킨다. 숨이 차다. 나열할 사람은 차고도 넘친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빛을 발하며 살아가는 느낌이다. 나는 이들을 통해 그들의 자리에서 펼쳐지는 예술을 본다. 내 인생의 허점을 메우는 그들의 재능을 보며 탄복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의 경지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고민을 지속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세운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감을 지으며 고유한 목적성에 감탄한다. 이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러니 실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재능을 발휘해 일상을 짓고 세상을 구제하는 작은 예술가들이다. 산업 발달에 힘입어 기술과 함께 더욱 진보하며 나아가는 고유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러니 각자의 고유한 개성은 우리 자신이 가진 문화적 자산이 아니겠는가. 기량을 증진시킬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의 산업 혁명이 궁금해졌다. 바라본다면 기술 중심의 발전에서 인간 중심의 발전으로 방점이 옮겨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고 넘쳐 이제는 치우쳐진 기술이 스스로를 쥐어짜 우리를 흔들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인생을 풍요롭게 했던 인간의 모든 문화적 역량들이 다시 번성에 이르러 재능의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길 상상해보았다. 각자의 재능을 연마해 삶의 장인으로 거듭나는 예술의 경지로. 멋지지 않은가! 그러니 다음의 산업 혁명은 개인에게서 시초 할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독창적으로 걸음을 떼어 온 인류에게 다채롭게 번질 일이다. 15세기 서양 문명에서 일어난 예술과 학문의 부활이 다시금 재현되어 개인과 인류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일이다.
기술도 예술이 되어 가는 시대다. 같은 기능을 갖춘 값싼 중국산 제품이 100만 원을 호가하는 세련된 디자인의 청소기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다. 장사꾼은 여전히 이윤을 생각해 많은 것들을 복제해 팔겠지만, 아티스트는 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한다.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는 기존의 가치들이 개성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다른 색을 발할 때 삶은 빛나고 일상의 차원은 격상된다. 모든 고유한 활동이 생기를 발하며 의미를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인생은 모든 허무와 무상(無常)에서 우리를 견인해 끝까지 구제할 것이다.
기술이 당신을 위로한 적이 있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 자체의 힘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로 구현된 인간 삶의 또 다른 단편이었을 것이다. 앵무새처럼 동일한 멘트를 반복하는 영혼 없는 기술에게서 우리는 삶의 희망을 바랄 수 없다. 삶의 희망은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로, 고유한 개성으로, 고유하게 뿜어지는 에너지로, 고유한 힘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 힘의 지속성과 방향성, 추구와 소실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재능을 살리고 죽이는 것 또한 우리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모든 역량들이 우리 속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로 뿜어져 누군가의 식탁에, 누군가의 글과 그림에, 혹은 누군가의 양육 현장과 일터에 생기 있게 나타나 흐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의 글과 이야기, 그림과 요리, 음악과 삶의 모습을 통해 나는 생을 지속할 에너지를 얻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인터넷으로 주소를 찾아 카드로 결제하며 기술을 활용했지만, 그들이 일상 속에서 가치를 덧입혀 만들어낸 많은 것들을 보고 그 속에서 문화적 진화를 이루었다. 영혼을 키우며 내면을 성장시켰다. 그러니 어떠한가? 우리 모두 일상에 재능을 덧입혀 각자의 예술을 함께 지음이! 누군가는 주방에서 냄비를 들고 누군가는 패드 위에 그림을 그리며 누군가는 나처럼 좌판을 두드리며 함께 예술을 발전시킴이!
나는 그런 시대를 꿈꾼다. 일상의 편리에 잠식되어 모두가 침몰하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재능을 갈고닦아 끝없이 삶의 희망을 불태우는 노장과 같은 생을 꿈꾼다. 개인이 시대를 열고 인류의 재능을 꽃피워 다시 한번 문화의 절정에 다다를 일이다. 우리들의 르네상스 시대를 꿈꾸어 볼 일이다. 매 순간 생성되고 부활하는 인생에 희망을 가져 볼 일이다. 그러니 르네상스 하자! 우리의 재능을 갈고닦아 선 자리의 예술가가 되자! 더러는 집에서 더러는 동네에서 더러는 지역과 나라를 넘어 세계로 가겠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영혼을 피워 삶이 지속되도록 꿈꿀 일이다. 예술할 일이다. 부활할 일이다. 그것이 다음 시대 산업을 견인하게 하자! 주제넘은 기술일랑 뿌리치고 내 아래 유용한 편리를 두어 아름답게 진화하는 인류의 모습으로 거듭나자! 찬란하게 부활해 예술로 구제할 일이다! 우리 삶을 더욱 탐스럽게 할 일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우리 모두 이제는 르네상스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