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한 템포의 휴일 오후다. 주섬주섬 고구마 몇 개 먹고는 서둘러 산행을 가준 남편 덕분에 꺼진 소파에서 늘어지게 한 잠 잤다. 어묵이랑 소고기 잔뜩 넣은 카레 떡볶이가 먹고 싶었지만 재료 사러 가기가 귀찮아 먹다 남은 치킨에 사과 반쪽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다. 휘- 자전거나 한 바퀴 타고 올까 고민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눈이 꽂혀 이내 쿠션을 끌어안고 다시 눕는다. 저녁에는 꼭 가야 할 텐데... 게으르고 안온(安穩)한 주말 오후다.
집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주중과 주말의 구분은 크지 않지만 그럼에도 주말 볕은 왠지 더 설레고 나른하게 느껴진다. 토요일 아침을 너저분하게 맞기 싫어 졸린 눈을 비비며 늦은 밤 치우고 잔 덕에 집 안 곳곳도 긴장을 늦추며 나와 함께 눕는다. 심심할까 켜 둔 텔레비전을 끄니 창문 밖으로 들리는 아이들 소리가 더욱 정겹다. 이곳에 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이 드는 평온한 오후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다시 고민하다 서둘러 져버리는 해가 아쉬워 덮어둔 노트북을 펼치고 쓰던 글의 매무새를 만진다. 출퇴근도 없이 어느 때고 자리를 펼치고 닫을 수 있는 이 무한한 자유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휴대폰 달력으로 날짜를 확인하며 작업 속도도 점검해본다. 기한을 지키지 못해 놓쳐버린 기회를 올해는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마음을 꾹꾹 누른다. 고장 난 월 패드 덕에 택배를 알리는 초인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고요한 시간, 나의 안온한 오후다.
내가 이전에 살던 집은 학군지 도로변에 위치한 이름 있는 아파트였다. 대구로 다시 이사오며 집을 구할 당시, 나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빛나는 동네에 집을 얻고 싶었다. 서울을 떠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나는 그즈음 위태하던 남편의 사업으로 반쯤은 떠밀리고 반쯤은 타협하는 마음으로 대구로 이사를 왔다. 늘 복잡하고 조금은 피로하지만 한편으론 생동감이 넘치던 서울을 벗어나 사는 일은 계획에 없었는데, 대구의 한 회사에서 남편에게 업무 제의를 하며 우리는 몇 개월의 주말 부부 기간을 거쳐 대구로 거주지를 옮겼다. 고향으로의 회귀 본능을 갖고 있던 남편은 환호했고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짐을 쌌다. 서른 해 즈음이나 살았던 지루한 환경을 답습하는 것이 싫었고 내 업무적 반경도 줄어들 게 뻔해 아무런 기대치가 없었다. 그러니 사는 곳만큼은 자극이 풍부하고 번화한 이름난 학군지 이길 바랬다. 다행히 집 값이 크게 오르기 전이라 전셋값에 조금만 보태면 집을 살 수 있었던 탓에 울상이던 내 얼굴이 조금은 펴졌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구매한 집은 8차선 도로가 있는 대단지 아파트 6층이었는데 집 앞으로 고가 다리가 뻗어 있어 창문을 닫아도 소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고 학교도 끼고 있어 또래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은 아파트였지만 살아 보니 편리한 인프라에도 불구, 밤낮 달려대는 차들 턱에 늘 소음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여름밤이었을 것이다. 에어컨을 틀어도 문을 꽉 닫고는 잠을 청하지 못하는 탓에 나는 바깥공기가 겨우 드나들 만큼만 창문을 빼꼼히 열어 두었다. 매연이 들어올 게 뻔했지만 문을 다 닫은 채로 잠을 청할 수는 없으니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새만 남겨 밀어 두었던 듯하다. 유독 도로 위를 달리던 차가 많던 그 밤, 남편과 나는 밤새도록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에 어떻게 잠을 이뤘는지 모른다. 우리의 말에 의하면 그 밤은 마치 시끄러운 대로 한가운데에서 날이 새도록 텐트를 치고 자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 성가신 날들이 이어지며 그렇지 않아도 소리에 예민한 나는 매일 스트레스를 받았고 문을 닫아도 유리를 파고드는 매캐한 먼지 탓에 우리는 몇 해를 넘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늘 데어봐야 아픈 줄 아는 호기심 많고 미련한 성격의 나다. 그때 알았다. 남들이 환호하는 동네가 내 주거지로 꼭 적합한 곳은 아닐 수도 있음을. 그렇게 찾은 곳이 바로 산 좋고 물 좋은 우리 동네, 바로 내가 사는 팔공산 인근이다.
대학 시절 선배들을 따라 데이트 비슷한 걸 하러 한 두 번 와본 게 다인 이 동네는 봄가을이면 철 따라 색을 달리하는 나무들 덕에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지역 명소다. 오늘 같은 주말 늘어선 차를 보며 뭐 볼 게 있다고 이렇게들 모이는 거냐며 남편과 가끔 키득거리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팍팍한 일상을 벗어나 주말만이라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스스로를 충전하고 싶으리라. 그래 봐야 이곳도 주말에는 바쁘고 소란스럽지만 그럼에도 눈을 청량하게 하는 숲이 있고 철 따라 나부끼는 바람도 있으니 매연과 소음이 즐비한 곳에 비하면 천국일지도 모른다. 스치는 나들이 객에게 짧은 위안을 선사하고 나에게는 일상의 여유와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곳, 이곳이 바로 나의 안온한 동네다.
추측해보건대, 이곳에 살지 않았더라면 글을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곳은 거실 소파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글도 쓰는 바꿀 때가 한참 지난 이 소파에 앉아 보고 있노라면 햇빛 드는 창 너머로 좌로는 먼 산과 강 줄기가 우로는 벽을 채운 투박한 내 그림과 가구들이 보인다. 겨울이 먼저 오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휘-하고 부는 오늘 같은 날엔 드넓은 강을 쓸어 담은 가을바람이 매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밤낮 까만 먼지로 나를 괴롭던 그 여름 찌던 바람에 비하면 하늘을 돌며 창을 비집는 이 바람은 한참 생기가 있다. 그러니 나에게는 노란 볕도 안온이고 부는 바람도 안온이고 갠 하늘도 안온이고 청회색 숲도 안온이다. 다시 말해 이 집에 거하며 숨 쉬는 시시각각이 나에게는 안온이다. 세상의 기준을 경험하고 비로소 빗겨 선택한 고유한 나만의 안온이다. 그러니 동네에 머무는 일이 지루하지 않고 고요한 힘이 되어 내 속에서 생각을 거르며 글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나는 이곳과 윈윈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안온한 일상 속에서 애써 싸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열정을 꺼내 지속시키는 일이다. 안온과 열정의 속성은 어쩌면 서로 정반대의 것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매일 그 속에서 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모습을 드러낸 열정이 안온한 일상에 묻혀 사장되기를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에.
"넌 정말이지 열정(熱情)적이야."
살면서 나는 한 번도 이 말을 들은 적이 없다. 타인을 바라보며 그들의 심각한 열정을 체감한 적은 많았지만 뭐랄까 나는 열정 하고는 좀 거리가 먼 타입이었다. 그보다는 진중하고 평화롭고 사색적이며 끈기가 있는 그러니까 나는 계획을 세워 도장 깨기 하듯 달성하며 보람을 느끼는 열정적인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건 동력이 약해 머릿속에서는 대궐 같이 집도 짓고 책도 쓰고 회사도 세우지만 행동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어떤 이에게는 계획만 많아 보이는 부류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다행히 경쟁심이나 질투심이 없어 이런 부분들이 살면서 나에게 큰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공평히 사는 인생, 누구나 한 번쯤은 칼을 빼들어 세상을 향해 휘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는 나의 안이함을 자각하고 부족한 열정을 끌어 모으려 나름의 노력을 기울인다. 동력이 끊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학습해 나의 가능성을 지속시킨다. 안온한 나의 일상에 쉬이 찾아들 수 없는 그 모자란 양념 한 스푼을 외부에서 조달해 꿈을 이루기 위해 적극 활용한다.
먼저는 열정을 학습한다. 누군가는 열정도 배우는 거냐며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지만 모자라면 끈기도 배우고 열정도 배워야 한다. 가깝게는 한 순간도 인생을 나태하게 살지 않으신 부모님을 보며 그분들의 열정을 학습한다. 내가 갖지 못한 강한 신념과 에너지 그리고 추진력 넘치는 부모님의 삶을 보며 감탄하고 모방한다. 열정의 근원이 선천적인 것인지 팍팍한 삶이 만들어준 후천적인 선물인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분들의 삶과 행동을 보며 나는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타인들을 관찰한다. 외곽에 갇혀 인맥이 별로 화려하지 못한 평범한 나로서는 만날 수 있는 사람의 부류가 다소 한정적이다. 그렇다 보니 무료한 시간 뒹굴 거리며 둘러보는 온라인상의 특정 다수가 주로 영감의 대상이다. 물론 나와는 일면식이 없고 SNS를 통한 소통 방식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기에 댓글을 열심히 달아 관계를 형성하지는 않지만 팔로우하고 있는 개인이나 기업가, 그리고 예술가들을 관찰하며 그들로부터 삶과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몸부림과 태동과 성장과 지속을 보며 그들의 열정을 익히고 답습한다. 책을 읽고 동기 부여를 받는 것처럼 온라인상에 노출된 타인들의 삶과 사업, 작업을 보며 그들의 열정을 모방한다. 목적과 동기는 내 안에서 계발되지만 그들의 동력에 나를 접목시켜 고요한 내 안의 안온을 흔들고 열정을 주입해 나의 지속 가능성을 늘인다. 이것이 내가 안온 속에서 열정을 유지하는 첫 번째 방법이다. 물론 이 뿐만이 아니다.
실패를 기억함으로써 열정을 지속시킬 수도 있다. 결혼 후 어느 지점부터 나는 쭉 실패한 삶을 살고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바닥을 치는 실패가 아니라 동력을 잃어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보낸 동일한 시간 동안 나는 실제로 실패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차지도 넘치지도 않는 평범한 삶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안온에 길들여지기 시작하며 스스로를 용납하다 일순간 안이해졌다. 계단을 내려와 안정 속에 발을 푹 담근 채 조금씩 그리고 점점 더 많이 나 자신을 용인하다 결국에는 해이해졌다. 무척이나 쉬웠다. 부담이 없었고 실로 편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중 일부의 시간은 나의 쉼과 회복을 위해 필요한 휴지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협의 순간들이 늘어나고 그러한 시간들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며 부정적인 습관을 형성해 원래의 에너지와 역량을 갉아먹었다. 냉정히 봤을 때 그 모든 순간은 실제로 작은 실패였으며 생을 대하는 느슨한 태도로 변질되어 삶을 해이하게 했고 결국 많은 시도를 제한했다. 그러니 해보지 않은 일에 그 어떤 성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인생이 매 순간 성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아가야 할 때와 멈출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달콤한 휴지기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은 분명 부정적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점부터는 본래의 자리를 뛰쳐나오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자리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작은 웅덩이를 헤엄치던 초라한 근육이 큰 바다의 파도를 견뎌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풍랑을 다시 거슬러 헤엄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처음부터 물장구를 치며 근육이 만들어질 때까지 과거에 했던 모든 것들을 오랫동안 복기해야만 한다. 역량과 에너지와 습관이 지속적인 동력을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차 올라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복원하고 계발하는데 나는 오랜 시간을 썼다. 그래서 지난했던 시절과 움츠린 과거의 모든 실패를 나는 기억한다. 이전의 모든 낙오를 거름 삼아 열정을 주입시켜 앞으로 나아간다. 이미 다음 역에 다다랐거나 어딜지 모를 그들만의 역을 끊임없는 에너지로 나아가는 타인들을 보며 부족한 나의 열정을 메워 지속할 힘을 얻는다.
그리고 계속 꿈을 꾼다. 꿈은 부족한 내 열정의 지속 가능성이다. 중년 여성은 대부분 자신과 연결된 가장 가까운 끈을 통해 그간의 삶을 보상받는다. 물론 모두가 그러한 것도 아니고 보상이란 어휘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생이 없는 성장은 없다. 시간을 부숴 삶의 자리를 메우고 대신 짊어지는 이가 있었기에 누군가는 성장을 하고 발전을 이룬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시간의 혜택을 입은 자 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든 시간을 스스로에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애완견이나 애완묘도 없는 대신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고, 나와 함께 하는 가족들이 있었다. 그러니 인생의 특정 시간은 주변을 챙기고 돌보는 나의 공적 역할을 위해 사용되었다. 공적 역할은 한계도 끝도 없지만 어느 즈음 모두의 삶의 풍랑이 마침내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의 사적인 꿈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 즉각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지속해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이 비단 글쓰기에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이걸 하겠다고 했다가 저걸 하겠다고 했다가 변덕스레 방황했지만 그럼에도 한 순간도 꿈꾸지 않은 적이 없다. 꿈의 불씨를 한 번도 꺼뜨린 적이 없었다. 누군가는 믿어 주었고 누군가는 무관심했으며 누군가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열정적으로 꿈을 꿈으로써 내 인생의 희망을 지속시켰다. 그러니 지친 순간에도 나는 계속 살아 있었고 열망은 나를 일으켰으며 그 강력한 감정을 통해 마침내 스스로의 등을 떠밀어 오늘의 나로 나아오게 된 것이다. 열망이 꿈을 낳아 자전하듯 움직였으며 그 회전축 안에서 나는 안온을 박차고 나와 비로소 꿈의 시간을 살게 된 것이다. 노트북을 펴 꿈의 나래를 잇게 된 것이다.
결국 내 안의 승패는 안온한 일상 가운데 스스로에게 둘러쳐진 나의 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열정을 끌어당겨 꿈을 지속하는 것이었다. 이 단순한 역학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던가! 안온에 갇힌 눈먼 자처럼 스스로를 제한시켜 얼마나 오랜 시간 한 곳에 머무르며 뒷걸음질 쳤던가!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기억한다.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모든 시절을 아로새긴다. 역사를 답습하지 않는 길은 반드시 기억하는 것이다. 진리와 같은 이 원리는 인류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안온한 시공간의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곧게 뜨고 나아갈 에너지를 생성하며 나를 비축한다. 그렇게 모인 에너지가 바람에 나부끼다 사라질 허사(虛事)에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며 안온한 일상 가운데 노을처럼 붉은 나의 열정을 지속해나간다. 뒤늦게 복구된 나의 열정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기를. 부족했던 지난날의 결점이 비로소 내 것이 되어 ‘넌 참 열정적이야’라는 뜻밖의 평을 그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들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