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페인> 리뷰
이 작품의 '아픔'을 보며 떠오른 것은 전에 교수님께서 해주신 이야기였다. 사람은 진화하면서 고통에 점점 둔감해진다고 말씀하셨다. 생존과 번영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은 외면하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능력이 발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통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되는 '아픔'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오히려 그 고통에 몰두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은 과거 참혹했던 장소와 사건을 찾아 헤매며, 상처의 진폭을 온전히 느끼고 이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에 담아낸다. 그리고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진화가 덜 된'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을 넘어 아픔의 공감과 연대의 감정을 경험한다.
<리얼 페인>의 데이비드와 벤지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통에 응답한다. 벤지는 밝은 에너지로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지만,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할머니께서 경험한, 자신의 민족이 경험한 홀로코스트의 비극 앞에서는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수준의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는 1등석 기차에서의 고급 식사와 생존자들의 피로 얼룩진 땅을 정보로만 치환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여행의 해설자 제임스를 강하게 비판한다. 반면 데이비드는 고통을 꾹 참으며 가급적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가족과 타인의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그의 태도는, 한편으로는 진화된 성숙함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벽이 된다.
나는 데이비드처럼 나의 고통을 묻어두었다. 2014년부터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 첫 운전 중에 일어난 사고, 부모님과의 갈등이 쌓여 어느 순간 폭발할때까지 계속 참고, 묻어두었다. 사고가 난 아침, 첫 사고 직후 불안해하는 나에게 화를 낸 아버지의 소리와, 내가 진짜 이루고 싶은 꿈을 털어놓지 못한 채 바라만 본 어머니의 무심함이 동시에 나를 압박했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전에 여자친구의 첫 사고 때, 그녀가 불안해할 수 있으니,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면 다행인 것이라고 그녀를 위로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사고가 났을 때는 불안해하던 나에게 화를 내시는 모습에 놀라 나를 더 압박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결국 수업이 끝난 후 어두운 집에 들어가자마자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울음은, 비로소 내 아픔을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 방아쇠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서로의 다른 가치관으로 몇 년동안 내 자신을 잃어가게 했던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했고, 아버지에게는 전에 말씀하신 것과 다른 모습으로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상태의 나에게 큰 아픔으로 다가왔고, 어머니에게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인정해 달라고 아픔이 폭발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진짜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아픔을 숨긴 채 벤지의 무례함을 변명하려다 결국은 감정을 폭발시킨다. 벤지는 사소해 보이는 언행 뒤에 치명적인 상처를 품고 자살시도를 통해 아픔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처럼 고통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진화의 과정에서 고통을 외면하거나 감정을 닫아버리는 쪽으로 진화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성장과 연대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데이비드와
벤지는 결국 완전한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상처를 인정하고 아픔을 웃음으로 융화시키려는 데이비드가 벤지에게 준 마지막 싸대기(?)와 같은 공감의 다리를 놓을 수 있을때 비로소 단단한 관계를, 연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 그 연대는 결국 우리를 더 아름다운 세계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