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일종의 사랑일까?
나는 영국에서 일하면서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귀국을 3개월쯤 남긴 시점부터 그곳에 머물던 나와 내 친구들(지금은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나의 하우스 메이트, 이들에 대해선 나중에 더 다뤄볼 예정이다)은 항상 이별을 이야기하며 일과를 보냈다. 점심에 차를 마시거나, 혹은 저녁 요리를 하다가 문득 이별이라는 단어가 불쑥 우리를 찾아왔다.
고작 한 달을 남겨 두었을 땐 하루하루가 카운트 다운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29일 남았네."라든가, "이럴 수가. 이제 고작 15일밖에 안 남았어!"라는 말을 할 때면 다 같이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기 일색이었다. 이별이 무서워 먼 미래를 약속하며 밤을 보내기도 했다. 2050년이 되면 화상통화를 하자는 약속을 비디오로 찍어 남긴다든가 하는. 아마 그때가 되면 화상통화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으로 만날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 25년은 그런 미래를 상상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니까.
이러나저러나 우리의 이별은 정해져 있는 미래였다. 우리는 그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도 일찍부터 이별을 준비한 탓일까? 이별하는 날 우리들 중 서로 앞에서 눈물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일찍 동네를 떠난 나는 기차 안에서 조금 울었는데, 그 친구들도 그랬을까?
이별의 슬픔과 이별의 공포는 다르다. 내가 친구들과 헤어질 때 느낀 게 이별의 슬픔이라면. 서비스 유저들와 헤어질 때 느낀 감정은 공포에 가까웠다. '서비스 유저'는 내가 일했던 복지센터 고객을 칭하는 말이다. 복지센터의 주 고객은 학습장애가 있는 성인으로, 나보다 어린 사람부터 70대가 넘는 노인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다. 이별이 공포라니, 조금 과한 표현이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저는 제가 그들에게 잊힐 거라는 사실을 아는 걸요."
나는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 남들보다 큰 사람이다. 나를 스치는 사람들에게조차 잊히지 않기 위한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그렇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나를 잊고야 말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들을 조금 미워했다. 그들 뿐일까? 내 동거자(지금은 친구라 부르는)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관계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까와 빠는 한 끗 차이라고, 농도가 짙은 미움은 순식간에 그만큼의 진하기를 가진 사랑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그렇고(보통은 반대가 더 많다). 마음은 내 안에 있음에도 참 알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사랑의 공식을 언급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상해->혐오스럽군->궁금한데->사랑해
불공평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들은 나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곧 잊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잊었을 수도 있다. 내가 있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움과 동시에 말이다. 어떻게 확언하느냐고? 나는 몇 번이나 그들에게 물었다. 이전에 일했던 봉사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냐고.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이 지금까지 만났던 봉사자는 100명이 넘는다. 그들에게 잊힌 100명의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별을 몇 개월 남기지 않은 시점부터 그들에게 항상 내 이름과 국적,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물었다. 심할 땐 하루에 세 번도 넘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 내 이름을 잘못 말한다거나 내 국적을 기억하지 못할 때 나는 다시 금방 슬퍼지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내가 잊히는 게 슬픈 거야? 아니면 나를 잊고 있는 그 사람들이 슬픈 거야?'
살면서 '학습 장애가 있는 성인'과 정서를 공유해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내게도 그들은 철저히 구분된 '타인'이었다. 초등학생 때 보았던 '아이 엠 샘'을 떠올려 본다. 10살 남짓한 나이였던 터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때 내가 느낀 아픔은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 혹은 '그럼에도' 아빠를 사랑하는 7살 딸의 성숙함이었다. 비슷한 주제의 다른 영화를 봐도 그랬다. 그들은 내게 타인이었고 나는 그들이 맺는 관계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다.
10살이던 때에 같은 반 아이들 중 학습 장애가 있는 학생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그 애와 말도 섞기 싫어했다. 그 애의 입가에 항상 고여있는 침이 보기 싫었고 그 애가 나를 만질 때면 팔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그래서 그 애가 내 팔을 만질 때면 화를 냈고 내게 다가오면 도망을 갔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담임 선생님께 불려 가 혼이 났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쟤가 만지면 팔이 가렵다고요!" 나는 이미 많이 긁어서 붉어진 팔을 박박 긁으며 울다시피 말했다. "쟤가 장애인이라고 쟤 편만 들지 마세요."
현재의 시선으로 보자면 나는 이기적 차별주의자였다. 고작 인생 10년 차였던 과거의 나에게 살짝 미안하지만, 성인이 된 내가 그때의 나를 타박하자면 아무튼 그렇다. 내가 그를 싫어하는 이유는 명확했지만, 그를 대하는 방식은 한참 잘못되어있었다. 그를 완전히 타인으로 바라보고 있어야만 가능했던 행동들. 14년 전의 일까지 불러내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이거다. 14년이 지나 그들은 더 이상 내게 타인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
복지센터에 처음 발을 들인 날 센터 직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서비스 유저들과 친구가 되지 마세요." 그 말은 즉 그들이 우리를 친구라고 인식하게끔 행동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J가 길을 걷다가 마주친 사람들에게 나를 친구라고 소개할 때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J가 나를 그렇게 소개할 때면 나는 항상 J에게 우리가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다음날이면 다시 나를 친구라 소개할 테지만 말이다.
J는 다른 서비즈 유저들이 내 국적을 헷갈릴 때마다 지도를 가리키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알려주던 사람이었다. 만약에 먼 훗날 다른 한국인이 J를 만난다면 J는 그 사람에게 나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까? 너 말고도 다른 한국인이 있었다고 알려줄 수 있을까?
내가 떠난 바로 다음 분기에 영국에 도착한 이들 중 아시아 소녀가 있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아시아인은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사실이었을까?
알 수 없는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를 혼자서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