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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덕 Apr 22. 2023

우린 널 기다려.

널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난 그때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기억하니? 키가 나와 비슷했으니까 너도 채 열 살이 안 됐거나 그즈음이었겠지? 1977년 눅지근한 여름 오후, 약수동 고갯길을 걷다가 마주친 너와 네 친구들. 서너 명이었나? 네댓 명이었나?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남자아이들 무리는 열 살 소녀를 당황시켰지. 부끄러웠던 건지, 두려웠던 건지,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그 자리를 지나가야겠다 생각했던 그 짧은 순간이 기억나. 그러고는 내 앞을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진 너. 바람처럼 지나간 네 형체는 내 입에서 터져 나온 악~ 소리보다 더 빨리 자취를 감췄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잠시 정신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은 기억에 없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찌르르한 아픔의 정체를 알아챈 건, 내 뒤에서 낄낄 대는 남자아이들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들렸을 때였어. 분홍색 치마 앞자락이 시커멓게 더러워진 것을 보고서야 네가 나에게 한 짓이 뭔지를 깨달았지. 그리 크지는 않았을, 기껏해야 열 살 소년의 작은 주먹이, 있는 힘껏 움켜쥐고 내려쳤던 것은 치마 자락 안에, 속바지 안에, 고요하게 잠자던 내 여린 음부였어.


너무 아팠지만, 맞은 게 분해서였는지, 아니면 뭔지 알 수 없는 억울함이 걷잡을 수 없이 몰려와서였는지, 펑펑 울고 싶은 마음에도 입술을 깨물며 끝까지 눈물 없이 집으로 돌아왔어. 나를 맞아준 할머니를 보고서야 눈물이 터졌는데, 그럼에도 할머니에게 한 말엔 뭔가 빠져있었지. "남자아이들이 날 때렸어." 어린 소녀의 생각 속엔, 맞은 건 고발할 수 있어도 음부에 남의 손이 닿았다는 건 언어가 될 수 없었던 거지.


널 두 번째 만난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였다. 동복을 벗고 하복 차림으로 등교한 1981년 여름, 수업시간에 등 뒤에서 다가와 겨드랑이 안 쪽 깊숙이 손가락을 넣어 슬쩍 꼬집던 너. 넌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생각할 겨를도 주지 않고 앞으로 스윽 지나가버렸어. 우리는 그래도 널 이렇게 불렀지. "선생님"이라고.


그러고 보니 우리가 또다시 만난 날도 여름이었네. 고등학생 시절 한가한 버스 안, 뒤쪽에 자리 잡고 앉아 집으로 향하던 나는, 아까부터 왼쪽 어깨가 간질거려 손으로 자꾸 털어내고 있었지. 계속되는 이물감에 옷이 당기는가 싶어 왼쪽 어깨 소매에 손을 올리던 순간, 물컹하는 느낌의 사람 손과 닿았어. 그러고는 바로 알아챘지. 또 너로구나. 이번엔 네 얼굴을 똑바로 봐야겠어. 난 더 이상 어린 소녀가 아니거든. 고개를 돌려 있는 힘껏 사납게 너를 쏘아보았다. 앞자리 여성의 브라끈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너를.


처음으로 네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난 정말 허탈했다. 그 자리에서 마주한 넌 세상 하얗고 순한 얼굴을 가졌더구나. 공산당이 도깨비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와 같은 허탈함이었어. 네가 황급히 내 눈을 피해 창 밖으로 시선을 둔 덕분에 더 잘 보였지. 목부터 점점 붉어지던 네 얼굴. 난 눈알이 빠질 듯 널 쏘아봤고, 넌 그다음 정류장에서 도망치듯 내리더구나. 그 버스 안이 아니라 미팅에서 만났다면 어쩜 에프터도 받아줬을 것 같던 청년의 얼굴.


너는 알고 있지? 네가 누구인지. 내가 아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너와의 기억이 있던데. 왜 너는 우리를 모른다고 하는 거니? 우린 널 만날까 봐 밤길을 피하고 택시를 못 타고 새벽 산행도 혼자 하지 못했는데 넌 번번이, 술에 취해서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 근데 너 실은 기억하지? 네가 한 짓. 설마, 정말 기억에 없는 거야? 너무 일상적인 일이라 생각 속에 담겨있지도 않은 거야?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기라도 한 거니? 우린 하나하나 다 기억해. 우리에겐 그게 다 일련번호 매겨지는 사건이고 가슴에 쌓인 돌탑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너도 미투에 응대하는 고백미투를 해보는 건 어떻겠니? 너와 함께 살아갈 인류의 절반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해 미안하다고 고백을 하는 게 어떨까? '미안하다'소리를 용기 내어 입 밖으로 내보낸다면 우리를 찌르는 가슴속 돌탑이 조금씩 낮아져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우리의 딸들에겐 그 돌탑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기도 하고. 말에는 힘이 있는 거, 너도 알지? 우리가 가서 널 찾아내고 응징하기 전에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쪽으로 길을 내고 싶다.


 IWILLSPEAKUP 같은 남성운동이 있었던 건 알아. 남성으로서 여성을 지지하고 다른 남성들에게 더 이상의 폭력은 안된다고 말하는 그 운동도 의미 있고 훌륭하지. 그런데 내가 제안하는 건,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백을 하는 거야. IAMSORRYTOO 라고 말하는 거지. METOO 가 나오기까지 우리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어. 그런데 우리는 해냈잖아. 자 이번엔 네 차례야.  IAMSORRYTOO 라고 말해볼 사람 어디 없겠니? 우린 널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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