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 신혼부부 1년차에 쉼표를 만나다

몰입의 순간

by 노드


진단 이후, 많은 것이 멈춘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멈춘 게 아니라 ‘비워졌던 것’이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지난 몇 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이루려 했다.

일에서 인정받고, 자격을 갖추고,

성취라는 이름의 작은 깃발들을 꽂는 것이

내가 사는 이유라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소중한 일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하나씩, 작고 꾸준한 것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공부’를 다시 붙잡았다.

한때 재미있게 봤던 회계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예전엔 자격증을 따기 위해,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공부했다면

지금은 그저 알고 싶어서,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책을 펼쳤다.

이상하게도,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외우려 하지 않았는데도 문장이 마음에 남았고,

문제를 풀면서 '아, 이건 이런 뜻이구나' 싶을 때마다

작은 만족감이 쌓였다.


“아, 이게 몰입이라는 거구나.”


시간이 아까워서 책을 본다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무엇에 쓰고 싶은지를 다시 묻는 시간이 된 거였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진단 이후 무조건 건강해져야겠다는 의무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냥 내 몸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숨이 차오를 때, 땀이 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릴 때 살아있다는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빨리 지쳤고,

근육통도 심했지만

그 통증마저도 반가웠다.


몸도, 마음도 천천히 나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느낌.

그게 가장 큰 위로였다.


이 두 가지가 내 하루를 다시 만들었다.


일보다, 약속보다,

‘공부하는 나’와 ‘움직이는 나’가

조금씩 일상을 채워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내 안에 있던 어떤 열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불꽃처럼 타오르는 게 아니라,

은은하고 오래 가는 온기처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이루지 않으면 불안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 이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가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시 ‘나’를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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