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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Oct 02. 2021

장르물로서 오징어 게임이 택한 선택지

'오징어 게임' 엔딩과 'D.P.' 엔딩의 차이점

넷플릭스 시리즈 D.P.의 바통을 이어받아 현재, 오징어 게임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른바 'K-콘텐츠'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중 가장 인기있는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도 있는 이 시리즈는, 반면, 한국에서의 평은 양극화를 보이고 있다. 범지구적인 흥행으로 이미 검증된 대중성과 동시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에 대해, 얼마 전 한국에서 선풍적인 바람을 불러들인 D.P.와 비교해 보고, 장르물로서의 오징어 게임에 접근해 보았다.




이 리뷰는 '오징어 게임'과 'D.P.'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시리즈의 제목이기도한 오징어 게임은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전통적인(?) 놀이  하나이다. 오징어 게임의 흥행이 고무적인 이유  하나는 지극 한국적인 문화적 요소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것에 있다. 그럼으로써 기시감이 느껴질  있는 소재를 가지고도 오징어 게임 자체의 유일무이한 색깔을   있게 되었다. 어디에서도  적이 없는 소재인 것은 아니나 극을 이끌고 가는 세부적인 에너지는 매우 구체적이다. 바로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누구나 겪었을 놀이들이 그것이다. 분명 시청자들 개개인의 기억에 가닿음과 동시에 같은 문화권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손가락을 깨물며 긴장하게 되는 문화의 힘을 오징어 게임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점은, 놀랍게도  세계에서 먹힌 모양새다.



속히 특정 놀이를 하다 상대방에게 잡히거나, 패배하게 되면 한국에선 '죽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의미를 그대로 대입시킴으로써 생기는 괴리감은 흥미롭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리셋버튼이 없는 게임이라는 설정은 분명 장르물의 형태를 띈다. 오징어 게임은 분명히 장르물이다.


그렇다면 '장르물'이란 무엇인가?

장르물을 정의하자면, 장르적인 특성과 문법이 명확해서 그 요소들에 충실하게 진행되는 것들을 장르물이라 정의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좀비물이 있을 것이다. 좀비를 요소로한 영화나 드라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좀비 자체가 장르가 되어, 좀비물을 감상할 경우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문법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폐쇄된 공간, 소수의 인간, 인간을 압도하는 양의 좀비떼, 한정된 구호물품, 인간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같은 것들을 보자. 여느 좀비물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이런 특징들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모아다가 각각의 장르물이라 표현할 수 있겠다. 한국에선 2010년대에 들어서 장르물들이 TV나 영화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몰았다. 범죄물, 수사물, 추리물과 같은 스릴러 장르들이 그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2001년 개봉한 영화 배틀로얄과 많은 비교를 당한다. 의문의 세력과 주동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게임, 서로를 죽이고 남은 한 명이 우승하는 시스템, 철저히 룰에 따라 진행된다는 점, 주동자에게 순순히 순응하지 않고 끝내 궐기한다는 점 등. 배틀로얄, 헝거게임, 이스케이프 룸과 같이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이란 장르물의 색을 진하게 띄고 있다.



장르물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하다. 장르물은 소수의 팬층이 두터운 편이다. 그 말은 대중성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장르물이 성행해왔다. 필자는 2007년도 방영된 쩐의 전쟁의 엔딩을 아직 기억한다. 주인공이 본인의 결혼식날에 악당의 지팡이에 뒤통수를 얻어 맞아 피를 흘리며 사망하는 것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에 어떻게 지상파 드라마 엔딩을 이렇게 낼 수 있나 싶은 정도 아닌가. 할리우드라면 꿈도 꾸지 못할 엔딩일 것이다. 당장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감독을 생각해보자. 봉준호. 그의 작품 중에서 완연한 해피 엔딩을 선사하는 작품은 단 한 작품도 없다. 한국은 이처럼 한국만의 색이 짙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욱 흥미롭게 접근한다. 속칭 한국의 장르라 불리운다. 할리우드 영화의 정반대편에 있는 듯한 한국의 콘텐츠들은 201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히 쌓아올라져 왔다. 그리고 현재의 오징어 게임이 있다.



그렇다면 장르물의 완성도는 무엇으로 정도를 메길 수 있을까? 일단 특정 장르물의 테크닉과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있을 것이다. 진부함과 장르의 전형성을 혼동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부함이라기 보단, 과거에 장르라는 개념이 탄생함에 따라 지금까지 적용되는 사항이다. 로맨틱 코미디물을 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물은 사실 뜯어보면 다들 비슷한 스토리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식의 로코물이 있을 것이며,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 사랑하고, 후회하고, 고백하고, 붙잡고, 결합하는 식의 엔딩말이다. 수 많은 로코물이 등장함에도 왜 사람들은 로코물을 보게 될까? 이는 각 작품들만의 색 때문일 것이다. 문법은 같더라도 감독과 작가의 장르에 대한 이해도와 저마다의 색으로 특별한 작품을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창작자라면 사람들의 예상을 빗나가면서도 장르의 법칙안에서 유연하게,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징어 게임이 타 작품들 보다 특출나게 뛰어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잔가지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이야기 전개도 있고, 과한면도 있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의 강점, 여타의 작품들과 차별점을 두는 것은 무엇일까?


 

오징어 게임이 여타의 비슷한 장르물과 다르게 내세우는 것은 한국의 문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구슬게임과 같이 매우 지역색이 짙은 문화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먹혔다. 오징어 게임의 흥행 1등 공신은 작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게임들 자체가 아닐까?


일단 오징어 게임의 요소는 그렇다 치고, 스토리로 접근했을 때,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한 성기훈의 선택을 보자. 장르물이 대중성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결국 대중들이 요구하는 선택(주인공이 결국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던가)을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뻔한 엔딩을 포기하고 오히려 길티 플레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해도 큰 리스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 장르물의 대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인터뷰가 있다. 미국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뿌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0ZeR


쿠엔틴 타란티노: '뿌리'에서 제가 정말로 크게 느낀 것은, 드라마를 전부 다 보면 16시간 정도 되는데 본인을 드라마에 집어넣어서 극중 인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준이죠. 드라마의 마지막화에, 극중 가장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 로이 브리지스'와 시청자들이 가장 몰입하며 지켜본 주인공 '겁쟁이 조지'가 있어요.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에 '로이 브리지스'를 나무에 묶어놓고 '겁쟁이 조지'가 채찍질을 하려 하죠. 끝을 내려 합니다. 우린 이 순간을 위해 16시간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평범한 영화에서 선보이는 선택을 하죠. '아니, 아니. 이럴 순 없지. 그렇다면 나는 네놈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니까.'라면서 말이죠. 그가 이 말을 뱉는 순간 미국 전역의 사람들은 '안돼! 혼쭐을 내줘야지!'


인터뷰어:그가 자초했는데 말이죠.


쿠엔틴 타란티노:본인이 자초한건데 말이죠. 제 영화에선 그런 걱정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필자는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의 선택을 보고 개인적으로 실망했다. 성기훈은 작중 우승을 코앞에 두고 게임을 포기하겠다고 한다. 그러곤 이기적인 선택을 일삼던 조상우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오징어 게임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제쳐두고, 장르물로서 성기훈의 선택은 개인적으로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피가 낭자하고 이기적이면서도 공감되는 사람들의 행위들로 스토리가 진행되다 종착지가 삶에 대한 메시지였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필자는 당혹스러웠다. 물론 메시지가 있어도 된다. 어떤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과연 그 메시지를 오징어 게임에 넣어야만 했을까? 그 선택이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를 쇠퇴시킬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장르물과 대중성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오징어 게임은 애매모호한 선택을 했다. 만약 성기훈이 옛날을 추억하며 용서를 비는 조상우의 이마에 칼을 꽂고 상금을 가졌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오갔을까? 사실 소수의 팬들에겐 찬사를 받았을지 모른다.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여전히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락적 성취는 분명히 선명했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은 장르물로서 끝까지 가는 모험을 선택하기 보단 안전한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아쉽다는 느낌이 강하다. 도발적인 소재, 흥미로운 캐릭터와 분위기로 가득찬 작품이기에 성기훈의 선택은 매우 아쉽다. 지금껏 455명이 죽을 때 까지 생존하며 상금을 타가야하는 저마다의 이유를 이해하며 게임을 함께 해오다 별안간 게임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호소는 시청자들을 설득하기엔 무언가 모순적이다. 입체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인물이 그냥 뻔하디 뻔한, 순진하게 착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D.P.의 선택을 보자. D.P.는 탈영병들을 붙잡는 군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다루고 있는 만큼 소재를 조심히 다뤄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사회적 파장이 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D.P.는 일말의 여지없이 절망을 선사한다. 우리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가 하면 돼. 와 같은 노선을 취하려나 싶다가 그 기대를 순식간에 실망시킨다. 희망을 주지 않는 그 대신에 D.P.가 말하고자 하는 불편한 진실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오징어 게임과 D.P.는 톤이 확연히 다르다. D.P.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울하지만은 않은 에피소드를 끼워 넣으면서 완급조절을 이루어내고 동시에 마지막 5,6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게 시청자들에게 크게 작용한 이유는, D.P.는 애초에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시리즈를 틀고 자리에 앉아 감상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메시지를 어느정도 감안하고 시청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원시원한 액션과 볼거리를 보기 위해 박물관을 가지않고 영화관을 간다. 무언가 기댈 곳이 필요하고 현답을 찾는 사람들은 저명한 저자의 책이나 유명강사의 강연을 찾지 않나.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기대한 엔딩은 이게 아닐 것이다. 오히려 D.P.의 선택이 더욱 과감했고, 합리적인 이해 가능한 선택으로 D.P.가 가고자 하는 곳에 시청자들도 기쁜 마음으로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D.P.와 오징어 게임이 선택한 것은 상반된다. 하지만 이것이 어느 작품이 뛰어난지 아닌지를 가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분명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피칠갑의 사람들이 서로를 쏴대고 죽이는데도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것엔 이유가 있다. 타란티노의 장르 이해도에 따른 완성도가 첫번째지만 궁극적으로, 별 다른 의미가 없이, 그저 오락적인 재미. 그것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족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다른 것에서 온다. 타란티노 영화에서 가족애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 대신 타란티노만이 선사하는 재미를 기대할 순 있다. D.P.는 군대 소재의 창작물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최고치의 여운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 아쉽게도, 오징어 게임에서는 기대했던 것과 다른 양심과 도덕에 관한 교훈을 받았다. 사실 필자는 그만 싸우고 돌아가자고 손 내미는 성기훈보다 남들 등쳐먹다 자기 목에 칼 꽂아넣은 조상우한테서 더 사람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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