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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Jan 20. 2022

영화 <괴물>로 살펴본 봉준호의 세계

괴물의 스토리, 캐릭터, 비주얼 스토리텔링에 관해

필자의 경우 유년 시절을 책임진 영화들을 뽑아보라면 특정한 감독들과 시대의 영화들을 꼽을 수 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스펙터클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선사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유년시절을 픽사의 전성기와 함께했으며, 해리포터와 같은 시리즈물과 함께 자랐다. 한국 영화들로 범위를 좁혀보자면 조금 결이 달라진다. 필자의 유년 시절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라 불리는, 바야흐로 2000년대가 시작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해는 2003년이었다. 지구를 지켜라, 장화 홍련, 클래식, 실미도와 같이 걸출한 작품들이 등장했던 해였고,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이 개봉한 해이기도 했다. 실미도는 한국 영화사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였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2000년대가 시작되던 시점에 등장한 신예 감독이 있었다. 화면 안에는 만화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연출이 이루어지면서도 사회 계층을 관통하는 통렬함이 영화의 뒤에 숨어져 있었다. 데뷔작이 흥행면에서 실패했다. 절치부심하고 만들어낸 두 번째 영화는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뒤 2006년 자신이 꿈꿔온 차기작을 세상에 공개하는데 이 영화가 괴물이었다. 어릴 적 최동훈, 김지운, 윤종빈, 나홍진과 같은 훌륭한 감독들의 영화들도 봐왔지만 누군가 나에게 한국 영화 중에 제일 재밌게 본 영화가 무엇이냐는 질문엔 항상 괴물을 이야기 했다. 과하게 편향적으로 보일 테지만 봉준호의 세계는 그만의 색깔이 뚜렷하다는 것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의 자리를 구축해나갔다. 그러니까 이 시기에 태어나서 한국 영화를 보고 자랐다면 봉준호의 세계에서 자랐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평단과 관객이 동시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탁월한 재능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우선, 그만의 색깔이 뚜렷하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 한강에 괴물이 활개 친다는 설정이나, 슈퍼돼지로 채택되어 뉴욕으로 날아간 애완돼지를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는 시골 소녀라는 설정이라던가, 멸망한 지구를 쉼 없이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혁명,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들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모라는 설정처럼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하나같이 평범한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소시민이라는 점이 영화를 현실에 이입할 수 있게 한다. 영화 괴물은 필자가 처음으로 영화관에서 관람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이고 개인적으로 그의 필모그리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다. 괴물안엔 드라마가 있고 메시지가 있을뿐더러 궁극적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영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가 먼저다. 먼저 재밌는 영화를 선보여야 한다.” 메시지나 유형, 형식도 중요할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이 모든 게 담겨있으면서 동시에 재밌는 영화를 만든다. 내가 봉준호에게 빠진 이유도, 파고들어 싶어했던 이유도, 그의 차기작을 계속해서 기다리는 이유도 모두 이것이다. 그는 재밌는 영화를 만든다. 이것이 아마 봉준호 감독이 현재 평단과 관객, 양쪽으로부터 압도적인 찬사를 받는 이유 중 핵심일 것이다. 기생충으로 이루어낸 업적으로 인해 봉준호는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 거장이 되었다. 그가 만들어낸 세계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고 특색이 있는지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영화를 주동하는 인물들은 강두와 그의 가족들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의 작품들에선 항상 소시민, 가족이 등장한다. 일련의 사건을 겪는 것은 그들이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결국 해결해내는 것도 그들이다. 일단 강두는 himbo 스타일 영웅의 느낌을 준다. 무식하게 맷집 세고, 힘도 세지만 그의 지적능력은 초등학생이나 그 언저리로 보일 정도이다. 그만큼 강두는 딸에게 진심이고 그로 인해 관객들도 그의 감정에 원초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강두는 실수를 한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현서가 납치되는 것도, 희봉이 사망하는 것에도 강두의 영향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강두의 잘못인가? 괴물의 존재가 먼저인가, 강두의 잘못이 먼저인가 따져보았을 때, 강두의 행위와 선택은 거대한 사회의 흐름에 휩쓸린 소시민의 선택으로 보여진다. 괴물같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휩쓸려간 일개 시민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현서와 희봉의 죽음은 강두의 탓인가?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를 생각해야 할 여지가 있다. 강두라는 캐릭터는 바보같이 순진하고 그만큼 진심이어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에 무리가 있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가 바보이기 때문에 영화에 당위성이 부여되듯이 말이다. 필자가 생각할 때 이는 현명한 접근으로 보여진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선 항상 사회와 그 안의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실제로, 사회적인 파문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실제로 괴물이 개봉했을 당시 무능하게 그려지는 미국과 정부 기관을 두고 영화 괴물이 반미 영화라는 논란이 생기기도 했었다. 현서는 강두를 닮진 않았는지 끔찍한 외형의 괴물에게 납치되어 비린내와 오물로 뒤집어 씐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방도를 모색한다. 현서가 극중에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겐 고무적이다. 현서는 관객에게, 둘도 없는 소중한 존재로 그려진다. 지키고 싶었으나 지키지 못했던, 뒤도 돌아보지 못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잡고 달려가 지켜내려 했지만 뒤에 남겨졌던 무언가로 다가온다. 소중하지만 끝끝내 놓쳐버린 삶의 어느 지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 절실한 상황에서 현서를 지켜내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는 이는 경찰도 정부도 아닌 가족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가장 주된 등장인물인,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괴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괴물의 특징으론, 일단 타자에 의해 생겨난 생물이다. 마치 4,50년대 고전 할리우드 공포영화처럼 화학물로 인해 탄생했다. 고위 기관과 권력, 무책임함의 산물인 이 괴물은 그 자체로 사회가 낳은 모든 부조리함의 표상이다. 사회의 응어리로 뒤틀린 괴물은 아무도 모르게 한강의 수많은 하수관 한쪽에서 몸집을 키우다 다름 아닌 한강 둔치에 등장해 평범한 시민들을 죽여나가고 현서를 납치한다. (이런 면에선 한강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캐릭터로 작동한다. 그러고는 국가는 강두에게 수배령을 내리고 도널드 화이트 하사를 추모한다.) 외적인 의미에서의 괴물은 돌연변이이기 때문에 장기와 신체 구조가 기형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중반부에 소화하지 못한 뼈들을 토해내는 장면도 등장했고, 제대로 걷거나 뛰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굴러넘어진다. 설정상 괴물은 청소년이고, 태어나서부터 쭉 혼자였기 때문에 상당히 외로운 개체다. 그래서인지 괴물이 처음으로 한강에 나타났을 때 괴물의 심정은 신나서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빗댈 수 있다. 꼬리로 사람을 때려 날린다던가, 사람이 많은 쪽으로 뛰어든다던가 하는 패턴이 보인다. 영화에서 괴물은 단순히 인물들 앞에 등장해 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곧잘 본인의 감정을 표출하는데, 희봉을 죽일 때를 예로 들 수 있다. 달려와 희봉을 치고 나서 꼬리로 감아 땅으로 내려친 뒤, 조롱이라도 하듯 아크로바틱을 연상시키는 동작으로 물에 뛰어들어 사라진다. 총에 맞아 죽은 척을 하기도 하고 몰래 숨어있다가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한다. 또한 활동적이고 사람들이 몰린 곳을 좋아한다.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층층이 설정이 잡혀있기 때문에 괴물에게조차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남주와 남일또한 캐릭터의 특성이 두드러지는데, 남일은 실패한 운동권 출신으로, 4년제 대학을 나와놓고도 직업이 없는 탓에 아버지에게 혼나기 일쑤다. 남주는 양궁 선수이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느릿느릿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희봉의 자식들인 강두,남주,남일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영화 종반부에서 이들의 활약은 더욱 감격스럽다. 강두, 남주, 남일 이 셋은 모두 어느 하나가 부족하다. 강두는 어딘가 모자란 탓에 현서를 놓치고, 희봉이 죽게되는 요인을 제공한다. 남주는 스포츠 선수임에도 느릿느릿하고 재빠르지 못하다. 뛰어난 실력으로도 결정적 순간에 활을 쏘지 못해 동메달을 따고, 남일의 문자를 받고 원효대교로 향한 남주는 괴물과 대면하지만 타이밍에 맞춰 활을 쏘지 못해 튕겨져 나간다. 남일은 성미가 급하고 억센 성격 탓에 신중하지 못하다. 병원에서 도주하면서 강두와 함께 남주를 챙기지 못하는가 하면, 지인을 믿었다가 잡힐 뻔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삑사리를 낸다. 영화의 마지막 결투씬에서 세 남매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강두가 분노에 휩싸여 괴물과 일기토를 벌이는 와중 기절하고, 뒤이어 남일이 한때 운동권에서 갈고 닦은 기술로 괴물을 몰아간다. 노숙자가 휘발유를 부어서 괴물의 정신을 돌린 상황에 마지막 남은 화염병을 던지려 하지만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깨지고 만다. 이어 남주가 걸어와 괴물의 눈에 활을 쏘고 강으로 뛰어들려던 괴물을 강두가 맨몸으로 막아선다. 




이 셋은 지금껏 결정적인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지 못해 기회들을 놓쳐왔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고 마땅히 이뤄내야 했을 것들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분명히 완벽하지 않고 부족한 이 평균의 사람들이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연대하여 본인들의 힘만으로 괴물을 물리친다. 문제를 해결한 것은 경찰도, 정부도, 기관도 아니다. 이름없는 노숙자와 강두 가족이 있을 뿐이다. 사회가 낳은 괴물을 죽이고 세 남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현서의 시신이다. 봉준호는 이렇게 한국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부조리를 이야기한다. 괴물이 가해자인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보면, 더 큰 무언가가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미국이 선이고 악은 외부에서 온다. 하지만 괴물은 반대로 미국이 풍자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반미 영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미국이 스스로를 제외하고 그렇게 비판의 대상을 외부에서 찾았다면, 왜 미국이라고 그 대상이 될 수 없는가. 끝없이 문제의 원인(바이러스)이 존재함을 입증하려던 미국은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 전지적인 시점에서 보았을 때, 미국이 원인 제공을 했고, 결론적으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오로지 시민과 괴물만이 피해를 보았다. 강두는 괴물의 죽음 이후에도 바이러스를 찾지 못했다는 미국의 발표를 발로 꺼버린다.




영화 괴물뿐만 아니라, 봉준호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에선 영웅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 특히 한국의 사회가 잉태한 봉준호의 캐릭터들은 선과 악으로 구분 지을 수 없고, 다층적인 면이 강하다. 아마 당시 한국의 시대상을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살인의 추억에서도 이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과 조용구가 벌이는 일은 범법행위에 가깝다. 경찰이 하는 짓이라고 볼 수 없다. 박두만의 수사방식에 지속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서태윤에게 폭발해 박두만과 서태윤이 몸싸움을 벌인다. 반장이 들어와 이를 목격하곤 의자를 집어던진다. 이 아수라장을 종결시키는 이는,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계속해서 무시당하던 여경사, 권기옥이다. (살인이 일어날 때 마다 라디오에서 우울한 편지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아챈 이 또한 권기옥이다.) 권기옥이 라디오에 우울한 편지가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리자 그제서야 싸움을 멈추고 밖에 비가 내리고 있음을 알아챈다. 대대적인 수색을 위해 반장은 병력 동원을 요청하지만 남은 인원은 없었다. 시청의 시위 진압을 위해 모든 병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처럼 봉준호의 영화에선 사회적인 흐름과 정서가 녹아 있다. 80년대 당시에 만연하던 부조리와 혼란스러운 시대상, 남성성의 횡포는 필히 피해자를 남긴다. 조용구는 다리를 잃고, 무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으며 끝내 범인을 찾지 못한다. 이쯤 되면 봉준호의 세계에서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캐릭터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연유도 없으며, 정의도 찾을 수 없고, 걷잡을 수도 없다. 시대상, 사회라는 거대한 지붕 아래에서 계급과 계층이 소시민들을 몰아세운다. 봉준호는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한다. 끝까지 봉기하고 맞서는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감탄이 나오면서 동시에 통탄스러운 점은, 봉준호 세계의 캐릭터들은,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봉준호는 본인이 70,80년대 할리우드 영화의 광팬이라고 밝혔다. 괴물이 흥미로운 점은, 할리우드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괴수물을 다루면서, 괴수물이란 장르의 전형성을 비틀어내는 것에 있다. 봉준호는 해외에서 장르 파괴자라는 수식어가 따라오며, 삑사리와 같이 장르를 비트는 것으로 유명하다. 봉준호 영화의 장르는 봉준호라는 표현까지 생겨날 정도이니까. 영화 괴물에서 이와 같은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는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대표적으론 괴물의 등장이 있다. 봉준호는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때, 항상 괴물의 전신을 보기 위해선 30분, 한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싫다고 했는데, 그래서 본인은 영화가 시작하고 곧 바로 괴물을 대낮에 보여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또한, 괴수물과 한국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그만의 색깔이 묻어나오는 장면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괴물이 한강 둔치에 등장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 합동 장례식이 치러진다. 그곳에 의문의 남성이 방호복을 입고 등장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내려 한다.





뒤이어 남일이 일어나 어떤 상황으로 흘러가는지를 설명하길 요구하는데, 방호복의 남성은 뉴스를 통해 사건을 알려주려 한다. 괴수, 재난물에서 뉴스는 항상 사건의 조짐이나 심각성을 알리는데 주요하게 사용된다. 이를테면 재난의 징조를 뉴스에서 전해주지만 정작 인물들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가 놓치는 식이라던가, 상황을 앵커가 설명하며 관객에게 대신 전달해준다는 식이다. 반면 영화 괴물의 위 장면에선 남성이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를 찾지 못하고 다른 인원들이 들어와 의사와 상관없이 방역을 시작한다. 이는 단순히 클리셰를 비튼 웃긴 장면일 뿐만 아니라, 정작 사건을 당한 당사자들에겐 무심하고 가학적이라 할 만큼 권위적인 모습의 정부와 기관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위와 같은 상황을 어렵지 않게 우리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장례식은, 당시엔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사건, 그리고 현재는 2016년 세월호 참사 사건과 같이, 집단적 경험으로서의 대규모 참사, 재난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실제로 위 장면에서 남일이 처음으로 등장할 때 뒤쪽을 보면,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가족 대책 위원회에서 보낸 화환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봉준호는 한국적인 것과 미국에서 만들어진 장르의 전형성을 한데 섞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를 설명 없이 느낄 수 있는 한국 관객들에겐 진귀한 경험이 될 것이다.



봉준호 영화는 쇼트 수가 적다. 본인도 의식하진 못했다지만, 괴물 편집 기사에게 “두 시간 짜리 영환데 쇼트 수가 몇 개죠?” 라고 질문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8백 3십 몇 샷이에요” 라고 답했다고 한다. 마더는 6백 샷 언저리이고 처음 1000샷을 넘긴 영화는 설국열차라고 한다. 그래서 봉준호와 함께한 촬영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봉준호 감독이 만드는 샷은, 잘게 쪼개어지지는 않으나 샷 내부에 움직임이 되게 많고, 복잡한 카메라 워크도 많아서 촬영팀은 힘들다.’ 봉준호 감독 영화의 장면들을 살펴보면 과거 할리우드 영화가, 일례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70년대부터 오늘 날까지 주로 사용하는 롱테이크, 워너(oner) 기법은 1,2분대로, 이 기법에선 샷과 샷의 연결에서 오는 리듬보다는, 샷 내부에서 이루어진 리듬을 많이 볼 수 있다.




4분부터


위 사진과 영상은 스필버그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이다. 45초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장면이다. 워너와 같은 기법을 사용하면 샷과 샷을 끊지 않고도 무엇을 강조할 것이며, 이를 위해 샷을 선별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동시에 리듬감을 잃지도 않는다. 위 장면은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그룹 샷, 오버더 숄더 샷, 인서트 샷, 싱글 샷, 클로즈 업으로 마무리 된다. 워너의 좋은 점으로는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동적인 리듬감, 생동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단점으로는 촬영 할 때 배우들의 동선, 카메라 워크가 합을 이루어내야 하므로 시간과 돈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위의 영상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연출한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엘레베이터 씬이다. 위 장면을 보면 그의 비주얼 스토리텔링이 어떤 방식으로 곧잘 연출되는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영화들은 대부분 샷, 리버스 샷으로만 구성된 장면들이 대다수이듯, 워너, 롱테이크와 같은 기법은 잘 찾아볼 수 없다. 롱테이크가 주는 즐거움과 생기가 뚜렷한데도 말이다. 봉준호는 사실 앙상블 연기를 곧잘 연출한다. 샷과 샷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나누기보단, 한 프레임에 여러 명을 데려다 놓고 누구는 카메라를 등지고 앉히거나, 화면 중심에 핵심 인물을 두거나, 혹은 카메라가 주도권을 잡은 인물을 따라가거나. 괴물에서도 위와 같은 장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위 장면은 강두 가족이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의 장면이다. 약 1분 7초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져 있고, 카메라의 움직임은 크지 않지만 서서히 인물들을 향해 다가온다. 대부분의 대화를 바스트 샷, 싱글 샷으로 찍고 이어붙이는 여타의 영화와는 달리 봉준호는 모두를 한 프레임에 넣어 놓고 배우들끼리의 협연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찍게 되면 인물과 인물 간의 상호작용을 컷의 방해 없이 지켜볼 수 있게 되고, 동적인 배경과 정적인 배우, 혹은 배우를 움직이게 하고 카메라가 이를 따라가면서 삭막하고 지루한 장면이 아닌 살아있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된다.






위 장면은 강두 가족이 현서를 찾기 위해 하수구들을 뒤지는 상황으로, 1분 정도의 롱테이크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 측면으로 움직인다. 강두와 희봉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일이 프레임 안쪽에서 대화에 끼어든다. 이후 카메라는 남일을 따라간다. 남일이 불평하자 프레임 왼쪽에서부터 남주가 휙 지나가며 일침을 날린다. 남일이 남주에게 다가가 말싸움을 하려 하자, 카메라가 이들을 빠르게 지나치고 프로파일 샷으로 희봉의 얼굴에만 초점을 맞춘다. 갑작스레 희봉이 프레임 안팎의 모두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희봉이 무언가를 봤고, 카메라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씬의 분위기가 급변한다. 강두가 이를 이어받아 프레임 안쪽으로 불빛을 비춘다. 이후 남일이 프레임의 중앙으로 들어오면서, 화면 바깥의 무언가를 가리키며 샷이 끝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동일하게, 여러 샷이 한 테이크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샷 안에서 동적인 요소와 리듬이 공존한다. 샷과 샷을 이어붙인다면 이런 시각적인 즐거움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지루한 장면이 될 것이다. 인물들이 움직이며 시선을 집중시키고 관객의 눈이 인물들의 눈과 손을 따라가며 함께 사건에 개입한다. 이러한 촬영방식과 비주얼 스토리텔링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느껴진다. 실제로도 그렇다. 영화에서만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방식을 적극 활용하면서 봉준호의 영화는 더욱 다채롭고 깊게 느껴진다.






영화 괴물은 분명히 오락 영화이지만 시사하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담은 장면을 생각해보다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이 영화의 엔딩은 현서가 괴물 뱃속에서 끌어안고 있던 노숙자 아이를 데려와서 살아가는 강두의 모습을 보여준다. 강두는 어둠 속을 응시하면서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깨우고 밥을 먹으면서, 뉴스에선 미국이 바이러스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강두는 이를 발로 꺼버린다. 강두는 현서를 구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두는 성장했다. 이제 강두는 보이지 않는 저변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위협이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하며 살아갈 것이다. 봉준호 세계의 영화엔 해피엔딩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결국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의 무책임한 결론은 없다. 차라리 절망을 이야기하고 현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나가야 하는 무언가를 준다. 누가 문제를 해결했는지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강두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에너지를 어둠 속 어딘가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위협을 대비하는데 쓸 것이다. 나는 그런 강두의 행보를 응원한다.      



그 모든 행위의 이유는 아마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것, 일 것이다.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는 사람을 위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을 살아갈 것이고, 권력자들은 본인의 영향력에 무책임할 것이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하지 않을 것이라면, 끊임없이 주시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시민이다. 봉준호는 항상 뒤에서 처먹고 몰래 싸대는 기득권층과, 그 영향력 밑의 소시민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지리멸렬은 말할 것도 없고, 플란다스의 개에선, 찌질하고 치졸한 윤주는 현남에게 자신의 잘못을 돌려 고백하지만 결국 용서(구원)받지 못하고 교수가 된다. 살인의 추억에선 형사들이 결국 범인을 잡는 데 실패한다. 설국열차에선 열차가 탈선하고, 옥자에선, 옥자를 제외한 돼지들이 도축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시스템을 뒤엎는데 실패한다. 기생충에선 기택이 지하실로 내려가고, 괴물에선 강두가 현서를 잃는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동시에 희망을 얘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현남은 플란다스의 개 엔딩 크레딧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햇빛을 비추는 것으로, 흠칫하고 있을 현실의 윤주들에게 메시지를 준다. 살인의 추억에선 어딘가에서 스크린을 보고 있을 범인을 정면에서 응시하며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설국열차는 결국 탈선했지만 시스템 바깥의 세상에 가능성이 있을 거란 여지를 주고, 옥자에선 새끼 돼지 한 마리를 몰래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괴물에선, 노숙자 아이가 있다. 이 막막하고 불가항력의 빗발이 쏟아지는 인생임에도, 봉준호는 살아가라고 이야기한다. 쏟아지는 햇빛과 같은 희망이 아니라, 삶의 절망 속에서도 아스라이 잔존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복잡하면 복잡했지, 분명히 장쾌하고 화사하기만 한 영화들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사도 그렇지 않나.




봉준호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된 것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 그가 지금껏 그려온 세계는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그만의 세계였다. 봉준호는 해외에서 항상 형식을 파괴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장르를 부수고, 감정이 서로 뒤엉킨 장면이 등장한다. 나이브스 아웃을 감독한 라이언 존슨이 봉준호에게 영화의 톤에 관해서 질문했다. 괴상하고 이상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영화에 연결 짓는지. 봉준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부조리라는 그 단어에 모든 게 들어있는 것 같다. 저도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서 군사독재 시절도 겪으면서 자라고, 여러 가지 변화와 격동이 많은 사회의 시간이었는데 내 몸으로 직접 느낀 부조리를 자연스럽게 표현했더니 영화를 보는 입장에선 1초 만에 톤들이 뒤엉켜있는 복합적인 느낌을 주게 된 것 같다. 사실 저희 입장에선 되게 자연스러운 우리들 삶의 표현 같은 건데.” 봉준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감독은 본인이 겪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직업이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분명 본인의 경험이 녹아 들어간다. 또 한편으론 “미국에서 만들어진 장르라는 것을 한국에 대입해보면 매치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스레 장르가 파괴된다”라고 말한 적 있다. 봉준호가 이토록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바로 본인의 식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본인의 개인적 경험, 사유, 시각으로 풀어낸 이야기들은 세계 어디서도 본적이 없는 이야기일 터이다. 봉준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니까. 봉준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재발언한 마틴 스콜세지의 명언이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의 세계는 이 문장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자막도, 해석도 필요 없이 봉준호가 만들어낸 세계에 이입할 수 있는 한국의 관객들은 운이 좋다고 할 수도 있겠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엔 수많은 은유와 상징이 등장한다. 평범한 대화나 사물에 표면적인 의미 그 이상을 담아낸다. 그래서 한 번 보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를 봤어도 다시 보게 되고 생각할 거리가 남아 있는 것이다. 최근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것을 얘기해보라면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기우의 친구 민혁이 가져온 산수경석이다. 산수경석은 기우에게 있어 죄책감과, 질투, 자괴감이다. 기우가 민혁을 보고 느꼈을 감정들이 한데 모여있는 사물이라 할 수 있다. 기우는 지속적으로 민혁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에 집착한다. 동생 기정이 부잣집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잘 어울린다라고 말한다던가, 민혁의 대사를 지속적으로 따라한다던가, 민혁이 좋아한다는 다혜와 깊은 사이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엔 파티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이곳에 잘 어울리는지 질문한다. 기우는 민혁이 되고 싶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며 반지하가 물에 잠기자, 당연히 가라앉아야 할 산수경석이 물속에서 떠올라 기우의 손에 자리한다. 물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그 감정의 응어리는 기우를 떠나지 않는다. 이후 체육관에서 잠자리에 들었을 때 기우는 이야기한다. 얘가 자꾸 나에게 달라붙는다. 자꾸 날 따라온다. 이후 기우는 그 산수경석으로 머리가 내리쳐지게 된다.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기우는 기택의 편지를 받고 다짐한다. 기택을 다시 지상으로 올려보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우가 계획을 세운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산수경석을 냇가에 두고 오는 것이었다. 민혁과 비슷한 복장을 한 기우는 부잣집을 구매하고, 계단을 올라온 아버지와 재회한다. 카메라는 환상을 저버리듯 위에서 내려와 창문 밑의 기우를 비춘다. 그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관객은 안다. 기생충은 ‘기우 너는 너만의 장점이 있어. 열심히 살면 다 잘 될 거야’와 같은 할리우드식 격려를 주진 않는다. 다만, 자본주의와 현재의 사회상이 낳은 지독한 감정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피하지 않고 대면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우리 또한 우리 마음속의 산수경석을 자연에 두고 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게 사람이고, 그게 현실이니까 아는 것이다. 구구절절 텍스트로 나열하지 않아도, 모두 느껴보았을 감정을 씨앗처럼 영화 안에 심어 놓는다. 다 보고 나면 메시지에만 호소하는 앙상한 프로파간다 영화들이 있다. 봉준호의 영화는 이들과 결을 달리한다.




괴물을 찍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할 당시에 상업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으면서까지 강행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도 영화에 대해서 질문하면, 본인이 잘하는,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 이유가 없다면, 왜 영화를 하겠냐며 반문하면서 말이다. 기생충의 수상 릴레이 이후로 좋아하는 감독? 얘기만 나오면 봉준호가 거론되는 것에 치기어린 마음도 들지만 이건 매우 기쁜 일이다. 속물 같을진 몰라도 봉준호는 영화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었다. 봉준호는 그래 마땅하다. 봉준호는 데뷔한지 20년이 넘은 베테랑이면서도 동시에 과감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면 왜 감독을 하는가’와 같은 발언은 흥미로웠다. 동심을 잃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인의 입으로, 보기와 다르게 순탄하게 영화를 찍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던 봉준호를 보면서 새롭게 느낀 점은 치열함이었다. 영화광에서 영화학도, 영화감독에 이르기까지 그의 원동력은 영화에 대한 애정이었다.이 글을 쓰며 평소 알고 있던 천재의 모습이 아니라 영화에 애정이 깊은 개인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봉준호의 눈에선 지금까지 영화계에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새겨져 있는 듯했다. 어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으며 매번 남들을 설득하는데 신경을 두면서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를 그치지 않는 봉준호의 세계를 유년 시절에 만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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