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최근 일본에서 힘차게 비상하는 감독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마구치 류스케. 그는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의 제자로 알려져 있고 대표작으론 해피 아워, 아사코 등이 있다. 또한 그는 2020년 구로사와 기로시가 감독한 스파이의 아내의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과거에 비해 삭막해져가는 일본 영화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황금 종려상 수상 이후 또 다른 환기가 되었다. 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영화관에서 관람하기로 마음 먹고 극장을 찾았다. 러닝타임이 세 시간이었던 터라, 너무 예술 영화스럽지 않을까 걱정이 들지 않았다면 순 거짓말이지만. 영화가 끝난 뒤 나는 만족스러웠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상처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예술 영화의 대체적인 공통 분모라 하면, 대충 상처받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서로 위안을 얻으며 인생을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가후쿠의 이야기만을 보았을 때 이 영화도 이 클리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들은 분명 이 영화를 독창적인 영역으로 올려놓는다. 이 영화가 왜 그토록 대단하고 평단의 찬사를 받는지 궁금하다면 빠르게 이 영화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기를 추천한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 이동진을 비롯해 많은 평론가들이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으며, 봉준호 감독 역시 이 영화의 굉장한 팬임을 밝혔고, 심지어 버락 오바마의 21년도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니.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것엔 이견이 없는듯 하다. 삶의 경험과 지혜가 아직 한참 부족한 필자가 보아도 이 영화는 굉장히 묵직하고 깊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필자는 이 영화의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감상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지극히 개인적일 수 밖에 없지만 마음에 남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 한다.
이 리뷰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의문이 생겼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가후쿠는 아내가 본인을 배신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질까 끙끙 앓던 인물이다. 가후쿠는 그 당시에 아내와 외도한 상대인 다카즈키가 본인의 연출작에 오디션을 보러오자 내치기는 커녕 주인공인 바냐역으로 캐스팅한다.(그 바냐역은 본래 가후쿠가 직접 연기한 배역이다.) 그는 본인의 두려움을 그 원천에게 내놓는다. 그는 아직도 아내에게서 벗어나오지 못했다. 다카즈키와 가후쿠의 차이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다카즈키는 새로운 작품을 찍을 때 마다 만나는 상대역과 염문을 뿌리고 가벼운 관계를 즐긴다. 하지만 가후쿠는 이미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헤어나오지 못한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다카즈키는 범죄를 저질러 연행된다. 가후쿠는 아내의 죽음 이후로 차마 맡지 못했던 바냐 역을 맡으며 다시금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영화는 가후쿠에게 완연한 안정을 선사한다. 다카즈키에겐 심판을 선사한다.
여기까지는 영화 내의 이야기다. 여기서 의문점이 들었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감독한 전작은 아사코이다. 아사코의 뒷 이야기가 있는데, 아사코의 주인공 역을 맡은 히가시데 마사히로와 카라타 에리카가 서로 눈이 맞게 되었다. 문제는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유부남이었던 것이다.(참고로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전처는 와타나베 켄의 딸이다. 와타나베 켄 또한 불륜으로 이혼했다.) 이로 인해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이혼했고 이는 일본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다카즈키라는 캐릭터가 원작에서도 존재했는지, 그렇다면 그 비중은 어땠는지에 대해선 잘 아는 바가 없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카즈키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며 전작의 저 두 배우의 영향을 받았을까? 필자는 큰 영향을 받았을거라 강하게 짐작한다. 아마 감독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다카즈키라는 캐릭터의 정 반대편에 있는 인물은 이유나이다. 이유나는 연극제의 일원인 공윤수와 부부 사이이면서, 소냐역을 맡은 배우이다. 이들에게 초대받아 운전수 미사키와 가후쿠는 밥을 먹으러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 둘이 주는 에너지는 다카즈키의 정 반대편에 있다. 이유나는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수화를 한다. 아시아 각국의 배우들이 자신의 언어로 연극을 진행한다는 특징이 있지만 수화는 유독 독특하다. 첫 째로,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 째로는 수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느낌이, 이방인이라는 느낌이 보다 강하게 다가온다. 이유나는 그만큼 작중에서 독창적이고 신비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유나는 가후쿠에게 완연한 안식을 선사한다. 음성이 아니라 손짓으로만. 모두가 숨죽이고 그녀의 메시지와 응원을 함께한다. 영화는 확실히 그들을 응원한다. 해가 뜰때 번뜩거리다 해가 질때 아스라히 사라져버리는 그런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는 해가 바뀌고 우리의 얼굴이 늙어감에도 버젓이 우리 가슴에 자리하는 어떤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을 시작하기에도, 가늠이 되지 않을만큼 무겁고 어두운 삶의 운전석을, 가끔은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고 함께 가라고. 그렇게 뒷자석에서 조수석, 그리고 마지막엔 서로를 마주보고,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달래주자고 말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전쟁이 있다. 도무지 옮길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영화는 삶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명작과 거장들의 영화와 뜻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살아가자.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잔인한 인생을. 살아가자. 이 말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죽지 않을 메시지다. 봉준호의 표현을 빌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영화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을 증명했다. 필자도 동의한다. 마무리는 극 '바냐 아저씨'의 소냐의 대사로 마무리 하고 싶다. 어두운 시기가 끈질기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해는 배신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다시 찾아왔다. 새롭게 시작하자는 듯이. 그래도 살아가자.
어떡하겠어요. 살아야죠! 바냐 외삼촌, 우리 살도록 해요. 길고도 숱한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참을성 있게 견디도록 해요. 휴식이란 걸 모른 채 지금도 늙어서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러다가 우리의 시간이 오면 공손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내세에서 말하도록 해요.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고, 얼마나 울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슬펐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릴 가엾게 여기실 테고, 저와 외삼촌, 사랑하는 외삼촌은 밝고 아름다우며 우아한 삶을 보고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뒤돌아보면서 우린 쉬게 될 거예요. 전 믿어요, 외삼촌. 뜨겁고 열렬하게 믿어요…… 우린 쉬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