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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Feb 27. 2022

당신은 이 남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HBO 아이 노우 디스 머치 이스 트루(2020)



여기 한 남자가 있다. 남들이 보기엔 과하리만치 모든 것을 홀로 감내하려는 남자가. 이 남자는 당신이 일상에서 숱하게 접했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퇴근길 지하철 역에서, 병원 접수대에서, 갓길에 세워둔 차 안에서, 출근길 신호등 앞에서, 당신의 친구가 말해주는 이야기안에서, 당신의 이웃집에서, 당신의 집 안에서. 이 남자는 갑작스런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공공장소에서 쓰러지면서도 '괜찮습니다!' 하고 소리칠 것만 같은 사람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어느 집이건 간에, 그 집 대문을 열지 않고선 속사정을 알 순 없다. 이 남자의 사정은 무엇인가. 마크 러팔로가 쌍둥이 1인 2역을 분한 이 HBO 시리즈물은 근래에 감상한 작품 중 필자의 가슴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왼쪽이 쌍둥이 형 토머스, 오른쪽이 쌍둥이 동생 도미닉

HBO 시리즈 '아이 노우 디스 머치 이스 트루'는 1998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두고 있다. 이 작품 이야기의 큰 줄기는 자폐증을 앓고 있는 형 토머스가 도서관에서 자신의 왼손을 스스로 자르는 통에 악명 높은 정신병원에 감금당하게 되고, 그런 형을 빼내려는 도미닉의 여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필자는 이 시리즈의 첫화를 절반쯤 감상하고 몇 주간 건드리지 않았다. 보고 싶었던 다른 작품들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아무리 HBO시리즈라 해도 너무 어둡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HBO가 제작한 드라마들은, 작품성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대표작으론 트루 디텍티브, 소프라노스, 밴드 오브 브라더스, 왕좌의 게임 등이 있다.) '아이 노우 디스 머치 이스 트루'는 총 6부작으로 회차가 그리 길진 않지만 그만큼 밀도 있게 진행된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의 중심엔 마크 러팔로가 있다. 매우 섬세한 표현력으로 쌍둥이간의 차이점을 연기한다. 또한 아역배우들을 포함한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괄목할만하다.



이 작품에서 형 토머스는 도미닉의 골칫거리이다. 적어도 시청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본인만의 세상에 빠져있으며 주변에, 특히 도미닉에게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힌다. 이 작품은 도미닉을 끊임없이 바닥으로 내몰면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도미닉은 이 모든 짐을 자신의 어깨에 얹기를 자처한다. 사회 복지사와 상담가 주변의 도움의 손길에 무안하리만치 자리를 내주지 않고서 말이다. 어느정도 보다보면 이 쌍둥이 사이의 사연들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도미닉이 토머스를 포기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차라리 포기했으면 하는 마음이 시청자 입장에선 크게 들 수 있다. 그런데 왜 도미닉은 토머스를 포기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대단히 섬세하게 진행된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6화라는 짧은 회차안에 쌍둥이의 유년시절, 새 아빠와 엄마간의 부부관계, 외할아버지의 사연, 도미닉의 개인사, 토머스를 빼내기 위한 도미닉의 일련의 노력들이 서로 퍼즐처럼 섬세하게 연결되어 서로 상호작용하며 이루어진다. 때문에 초반에 흥미가 돋지 않으면 시청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만, 극이 진행될수록 이야기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기 때문에 그 감흥이 배가 된다. 게다가 일단, 되게 잘 만든 시리즈이다. 이 작품의 스포일러를 최대한 줄이면서 이야기 하고 싶기 때문에 말을 줄이겠지만, 이 작품은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이 작품은 지구 반대편 서방 국가의 어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가족, 가정사와 닮은 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도미닉과 토머스는 과거의 가부장제의 잔상이다. 그들의 새 아버지는 독불장군의 성격으로 두 쌍둥이를 키웠으며 처신할줄 알았던 도미닉과 다르게 여리고 섬세했던 토머스는 그 트라우마가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 가부장제에 의한 폭력은 비단 동방예의지국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도미닉이 토머스를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본인은 과거의 아버지들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 그 용기말이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다닿을 수 있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투성이었던 시대상은 고스란히 평범한 가정들에 투영되어 또 다시 폭력과 피해자를 남긴다. 인간의 원죄처럼, 저주처럼 피를 타고 유전마냥 대물림되는 이 족쇄를 끊어내기 위해 도미닉은 고군분투한다. 자신만은 떳떳하게 살고 싶기 때문에. 도미닉이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등지고 갈 순 없다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었던 것 마냥 행동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 신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은 분명 고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가정사이건 섣불리 판단해선 안된다. 이 작품은 그 '어느 가정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 그는 이런 선택을 했는가. 왜 이 남자는 이렇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어느 한명의 인물을 악으로 몰아가거나 변호해주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매우 건조하게 진행된다. 도미닉을 중심으로 감정선을 따라가며 전적으로 시청자에게 감상을 맡긴다.  그 굴레를 벗어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작품을 감상할때 도미닉이 눈물을 흘리고, 그를 위해 타인이 눈물을 흘리는 몇 안되는 장면에 집중해주었으면 한다. 폭포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냇물처럼 뒤에서 앞으로 흐르는 인생에서, 정답이 없는 우리네 인생사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과거의 낙인에서 눈을 돌리고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바라건대,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멈추고서 말이다. 이 작품의 끝에 다다르면 도미닉과 시청자는 깨닫게 된다. 정답이 없는 인생에서 그것만은 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누구인지는 피로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마음씨로 증명된다. 우리는 더욱 나아져야 한다.






인간은 실수한다. 실수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못된 말을 내뱉을 수도,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도, 증오와 해악을 마음에 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후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다. 증오로 점철된 말을 상대방의 얼굴에 내뱉는 것을 기억의 마지막 장면으로 채울 것인지 혹은, 지금 그 사람에게 다이얼을 누르고, 얼굴을 보고, 용서하고, 사과하고, 사랑할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가혹하리만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걸어가기 보단, 곁을 지켜주는 사람에게 짐을 나누어 주며 걷자. 아마 그 사람은 당신이 부탁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이토록 두껍고 짙은 작품은 실로 드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현재 웨이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ps  흥미로운 점이 한가지 있다.  작품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데릭 시엔프랜스라는 영화감독이다.  감독의 대표작으론 '플레이스 비욘드 파인즈' 있는데, 재밌게도  작품또한  아버지와 그들의 아들 사이에 관한 이야기다. 데릭 시엔프랜스는 아버지와 아들 혹은 가족간의 이야기에 관심많아 보인다. 만약  시리즈를 보고 마음에  사람이 있다면 '플레이스 비욘드 파인즈'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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