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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Sep 13. 2024

한국에서 정의를 말하는 방식

영화 베테랑2 (2024)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꾸준히 사랑받아온 소재가 있다. 이 소재의 주인공은 몸을 내던지고, 온갖 악행을 무릅쓰기도하고, 우리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며, 인터넷에서 목격하며 눈살 찌푸리는 대상을 상대로 정의구현해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해당 소재의 국내 영화만이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다이하드>가 있다. 바로 형사물이 그것이다.


2015년 대국민 배우로 등극한 황정민을 주연으로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을 만들었다. 베테랑은 가볍고 위트있는 유쾌한 톤에 사회비판을 한 두방울 떨어뜨린 형사물이다. <베테랑>은 천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현재까지 흥행신화를 이루고 있는 <범죄도시>가 2년뒤에 개봉했다.


이번에 개봉한 <베테랑2>는 생각보다 진중한 자세를 취한다. 마치 우화처럼 그린듯한 절대적인, 순수악을 묘사했던 전편과 달리 본작에선 사회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 언제 흘러넘칠지 모르는 숨겨져있는 형태의 악을 그린다. 전편에서 붓으로 크게 휙휙 그어 정의내린 듯한 정의에 '조금만 더 들어가보자'는 식으로 제작된 <베테랑2>는 현세의 상황을 좀 더 쪼개어 깊게 바라본다. 상업 영화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하며 동시에 메시지를 전하려는 본작이 우리나라 대중문화, 특히 영화계에서 정의를 어떤식으로 풀어내려는지, 동일한 장르물의 다른 작품들과 어떻게 다르게 얘기하려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한국에서 '형사'가 어떤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형사(Detective)는 책상에서 벗어나 발로 뛰고, 현장에서 모든 진실을 직면하는 투박하고도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형사는 경질될 위험에 처해도, 자신의 안녕이 위태로워져도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더욱 집중하고 행동한다. 사건에서 손 떼라는 반장과 대립하다가 경질될 위험에 처한채로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인정받는 클리셰가 절로 떠오르지 않는가. 앞서 말했듯, 형사는 (실제로도 어느정도) 개인적인 손해와 피해를 무릅쓰고 사회에 필요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뜨거운 인물들로 그려진다. 다시 말해,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형사들은 정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형사는 사회적인 정서에 직결되는 인물들이고 동시에 대중문화에서 적지 않게 다루어지는 실존하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형사는 대체적으로 어떻게 소비될까? 조금 더 나아가, 어떻게 소비되어야 할까? 세상은 바야흐로 가짜뉴스의 시대에 들어섰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사회말이다.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사회에서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곳에서 정의를 찾는다면, 그것은 누구의 정의여야 하며, 과연 어떤 것을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뜻 대답할 수 없다. 같은 시각, 영화계에서는 그 대답을 어느정도 쉽게 내놓았다. 대표적인 작품만 뽑아보겠다.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3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시리즈. <범죄도시>를 살펴보자. <범죄도시>는 지금까지 총 네 편이 제작되었고, 한 작품마다 주요한 악역이 1명씩 등장한다. 1편의 장첸, 2편의 강해상, 3편의 주성철, 4편의 백창기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했을 때 이들의 공통점은 '지나치게 악하다'는 것이다. 모두 흉악범들이고 모두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사이코패스의 성질을 띄고 있다. 때문에 영화는 이 네 명을 대변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모두 사회를 위협하는 순수악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때문에, 마동석이 연기하는 마석도는 고뇌할 필요가 없다. 그저 위치를 알아낸뒤 찾아가서 두드려 패면 될 뿐이다.



<범죄도시>에서 마석도는 편이 거듭될수록 흥미로운 위치에 자리한다. <범죄도시>는 마석도를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슈퍼히어로 영화, 소년만화, 어쩌면 서사를 가진 거의 모든 대중문화에서 그려지는 '캐릭터'들이 사랑받는 이유는 성장하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와 다르게 끝에 가선 캐릭터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석도는 네 편의 영화동안 성장하지 않는다. 1편의 마석도와 4편의 마석도는 성장한 부분이 거의 없다. 영웅은 또한, 희생한다. 희생하기 위해서는 캐릭터가 고뇌해야한다. 전과 동일하게, 마석도는 희생하지 않는다. 마석도의 주위 인물들이 이따금씩 희생당하기는 한다. 그 동력으로 마석도가 움직이는 경우는 있다. 재미있게도 마석도는 오히려 주변 인물을 이용한다. 장이수가 대표적이다. 장이수 또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자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맘놓고 그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을 즐긴다.


정리하자면 마석도라는 캐릭터는 가벼운 캐릭터다. 글로 나열해 보았을때 호감형이라고 부르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드는 수준이다. 그런데 왜 마석도는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는가? 이는 현재 한국의 정세에 대한 국민의 불편함을 (그것도 호쾌하게) 해소시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범죄도시>는 서사가 중요하지 않은 작품이다. <범죄도시>에서 등장하는 악당들은 사회에서 응어리진 어떠한 감정의 의인화에 가깝다. 그러므로 서사가 필요없다. 관객은 돈을 내고 내 문제를 두드려패는 영웅을 보려는 것이니까. 마석도는 범법자를 체포하는 형사고, 다부지고, 우리가 현실에서 떨며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을 뚜벅뚜벅 걸어와 해결하는 인물이다. 다시말해 관객들에게 마석도는 정의를 실현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범죄도시>는 마석도가 정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라고 말한다. <범죄도시>는 환기같은 것이다. 상쾌하긴 하지만, 방안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는다. <베테랑2>는 전편의 위상에 힘입어 <범죄도시>시리즈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2>는 좀더 진지해지길 선택한다. 본작에선 '왜를 생각하지말고 어떻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본작은 사회에서 악이 탄생하는 '왜'에 집중하기를 선택한다.


류승완은 사실 사회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가 감독한 <부당거래>는 정면에서 사회를 비판한다. 동시에 필자는 매우 훌륭한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도 수준급이며 영화는 대체적으로 메시지 위주이지만 장르물로도 그 재미를 잃지 않는다(마동석은 해당 작품에서 형사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베테랑2>가 메시지에 좀 더 집중해도 어색하지 않다. <베테랑> 시리즈의 주역인 서도철은 마석도와 조금 다르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서도철은 전편과 다르게 성장한다. 영화에서 주된 추격,액션씬이 끝날때 마다 서도철은 고뇌한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정의를 집행하는 인물로서 서도철은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것은, <베테랑>은 서도철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홀로 해결해내는 영웅보다는 팀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다.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팀의 일원으로서 움직일 뿐이다. 또 누군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서도철은 연대하는 인물이다.


또 서도철은 실패한다. <베테랑2>에서 그리는 서도철은 <다이하드>의 존 맥클레인과 매우 흡사하다. 서도철과 맥클레인은 두 영화에서 모두 '실패한 가장'으로 그려진다. 존 맥클레인이 사랑받는 이유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맥클레인은 다친다. 절뚝거리고, 상처를 입는다. 관객이 환호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맥클레인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에 있다. <다이하드>의 1편에서 맥클레인은 악당을 물리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끈채로 차에 올라타 자신의 아내에게 사과하기에 이른다. <다이하드>는 자신의 아내에게 사과하려는 한 가장의 이야기다. <베테랑2>의 서도철도 동일하다. 서도철은 '관객의 문제를 손 쉽게 해결해내는 영웅'이 아니라 '가정에서 어긋나고 실패하는 가장'으로 그려진다. 어찌보면 그런 가장이 영웅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영웅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까. 서도철은 변화하는 인물이다.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행동에 사과할 줄 아는 인물로 성장한다.


서도철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이유에는 현재의 사회상이 크다. 본작에서 서도철을 고뇌하게 만드는 새로운 악은 '부조리함에 분노하는 악'으로 볼 수 있다. 아베 신조를 암살한 피의자가 그랬듯, 도널드 트럼프를 암살하려던 피의자가 그랬듯이 본작에서 등장하는 악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행위를 몸소 실천하는 악이다. <기생충>에서 다루어지는 그것과 비슷하게, 사회 어딘가에서 기형적으로 생겨나는 정의를 실현하는 군상들을 본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의의 사전적 의미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이다. 현재 전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정의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필요하다. 오늘 날 보도되는 '악'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악행을 저지른 정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적확한 '왜'를 찾아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를 대처하는 사법제도의 태도는 정의와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사람들은 차라리 자경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소리치고, 이에 대한 작품들도 무수히 등장했다.


그렇다면 이런 법이라는 울타리 밖에서 '악'을 처단하는 것은 사회를 위한 미덕인가? 악덕인가? 그렇다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부조리함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점점 몸집을 키우는 뒤틀린 '악'이 탄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류승완은 이 상황에 '사회가 낳은 악을 심판하는 형사'의 이미지를 단순하게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는 이에 동의한다. 소화하기 편하게 조리되는 것이 대중문화, 상업영화라고 하지만 이미지를 가져와 편의적으로 사용하기만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중들에게 크고 넓게 선보일 수 있는 작품일수록 조금 더 진중해질 필요는 있다. 관객들이 마석도를 영웅으로 보게되듯, 작품이 말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될 것이니까.




필자는 조금 과장해서 현재의 우리가 '미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지금이 과도기를 지나고 있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건이 생기고 무고한 피해자가 생겨난다. 피해자는 대체적으로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피의자는 사법제도의 취약한 부분만 건드려 형량을 낮추기 위해 애쓰고 이 와중에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애쓴다. 거기에 이런 이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에 이르고,  우리는 모든 것을 목격하게 된다. 차라리 이들의 행태를 알지 못했을 때라면 어디에선가 정의가 구현되고 있을 수도 있다며, 그래도 피의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질 수라도 있었지만 현재 우리는 이 모든 기대를 무너뜨리는 실망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문화는 무엇을 해야할까? <베테랑2>가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는 메시지를 매우 매끄럽게 선사한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본작이 내딛는 발걸음엔 매우 동의한다. <베테랑2>의 영어 제목은 <나, 집행자>이다. 영어 제목처럼 본작은 정의의 집행자로서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정의다. 과연 무엇이 사회를 위한 정의의며, 더 나아가 개개인의 정의가 될 수 있을까? 부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고, 그것이 본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라는 법은 없다. 극중에서 서도철처럼 고뇌하고 애쓰는 사람이 곧 영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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