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BC470~BC399)의 가르침과
자신의 집착과 욕망을 깨닫고 벗어나라는 부처(BC560?~BC480?)의 깨달음은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2500년 동안 인류는 이 문제를 풀지 못했고,
왜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알아야하고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먼저, 집착과 욕망은 너무나도 감정적인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며
관련 과거 기억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며, 그 감정을 통해 사건의 중요성과 호불호를
즉시 판단하게 되고, 이에 따라 미래를 대비하는 방향성, 즉 욕망을 일으키게 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논리적인가 만이 아닌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얼마나 '중립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가를 포함한다.
즉,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감정적인 판단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함께 물어본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치우친 답변을 하는 상대에게 다시 질문을 던져 생각하게 하고
가치중립적인 가르침으로 이끈다.
소크라테스 대화편의 주제들은 또한 사랑, 즐거움, 올바른 삶, 정의 등 감정 자체
그리고 감정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주제를 담고 있다.
(물론, 너무나도 유명한 국가편의 동굴 비유에 초점을 맞추어, 이데아와 이상세계, 개념화,
이성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일부라 생각하며 이 또한
감정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외부의 세상의 것을 받아들이는 감각-지각-그리고 학습,
이에 대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과 결정.
이 뇌의 정보처리 및 인지과정에서 우리의 감정이 관여하지 않는 부분은 없다.
받아들이는 것도 감정에 따른 호불호에 따라 선택이 되고,
판단과 결정도 논리적인 형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결국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해 형성된 감정을 기반으로
결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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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 시대, 이성의 시대(대략 1660~1800년)동안,
근대정신과 합리성을 대표하는 데카르트 및 합리주의-계몽주의자들이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고,
정신기능 중에서도 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비판적이며 무결하다고 가정하는
이성을 원동력 삼았고, 이를 기반으로 눈부신 근대화를 이룩하였다.
다른 동물에 비해 뒤쳐지는 신체를 이성이라는 정신으로 극복하며,
더 높은 이성을 무기삼아 본인들의 거주반경에서 벗어나 서구인들이 살지 않던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문물을 전파하여 현대 세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성적인 근대인들이 놓친 부분이 있다.
정신기능에 '이성'만을 올려놓고, '감정'을 미숙하고 지배하고 관리해야할 타자로 둔 것이다.
온전한 정신기능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성에서 감정을 제외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신과 신체의 통합 관리자 이자 감독관인 '감정'을 배제하게 된 것이다.
감정을 배제해왔던 흐름이 현대사회의 개인의 정신건강의 이상과 사회의 갈등이 촉발되는 이유 중
하나인 것으로 나는 생각하며,
이를 다시 주목하는 19세기 중반 이후 새로운 흐름들은
-실존주의 철학, 정신분석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 감정 뇌신경과학 등-
이성의 시대에서 놓쳤던 감정을 채우는 회복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300년 가까이 인간의 감정은 정신도 아니고 신체도 아닌 것으로 치부 되었지만,
감정은 정신생활의 핵심-고갱이이고 감정반응은 곧 사건에 대한 신체적인 반응이기 때문에,
정신건강 관련 종사자 및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정에 더욱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개인적 합리주의, 사회적 구조결정론을 넘는 변증법적인 담론으로서
'감정'이 두 이론의 간극을 메우고 개인과 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설명이 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