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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Mar 25. 2024

각방 이야기 2

남편의 ‘불행하다’는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다.

자기감정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절제된 남자가 던진 말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뭐, 잠 좀 설친다고 죽기라도 하겠어? 그냥 살던 대로 살자.’

딸들에게도 단속을 했다.

거실행을 의미하는 어떤 말과 행동도 하지 말자고. 부탁은 아이들에게 했지만 내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아빠한테 언니가 너무 했네. 언니 탓이네.”

'남편의 영혼의 단짝' 작은딸은 아빠가 연신 불쌍하다며 언니를 나무랐다.

“‘오늘 아빠 거실에서 자야겠네’ 이런 말 밖에 한 죄 없는데... 매트리스 한번 깔아줬고...”     


남편이 귀가했다. 여자 셋 일제히 한 마디씩 던진다.

“아빠, 불행하면 안 되니까 무조건 안방서 자.”

“엄마 갱년기 때문에 잠 못 자는 걸 괜히 아빠 탓으로 돌렸어. 엄마가 나빴네.”

“여보, 그냥 자. 나 이제 괜찮아.”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남편이 어리둥절해한다.

      

옆에서 잘 줄 알았던 남편이 이불을 끌고 나간다.

“아니, 어딜 가?”

“거실에서 잘게.”

“왜? 불행하다며.”

“당신 잠 못 자서 학교 애들한테 짜증 내며 어떡해. 그냥 밖에서 잘게. 편하게 자.”

“괜찮아?”

“처음만 좀 그랬지 자보니까 편한 것도 있네.”

아이고 이 반응은 또 의외다.

어렵게 꺼낸 구애가 거절당한 것 같은 무안함이 살짝 든다.       


새벽 알람소리에 밖으로 나오니 남편이 거실 한가운데  웅크리고 자고  있다.  

한참을 쳐다보다 살금살금 아침을 준비한다.

국 끓이고 반찬 하나 준비하는데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출근 시간은 다가오는데 마음이 다급해졌다.

오늘 재활용 날인데 베란다에 수북이 쌓여 있는 저것들은 또 언제 내놓나.

떨그럭 거리는 소리에 남편은 일찌감치 일어나 출근 채비를 마쳤다.

옷도 못 갈아입고 종종거리는데.

먼저 나간다. 갔다 올게.”

말쑥한 차림의 남편 모습에 심통이 난다.

신발을 신고 나가는 뒤통수에 소리쳤다.  

“여봇!! 나 불행해!”

“뭐? 뭐라고?”

남편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

“나 혼자 아침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재활용하고 출근하라곳!”

이 마누라 못 말린다는 듯 남편이 웃는다.


양손 가득 재활용품을 안고 현관문을 나서던 그가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이제 안불행하지?”

“응. 안 불행해. 헤헤.”     


한동안 ‘나 불행해!’는 우리 식구 만능 패스워드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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