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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Apr 21. 2024

이제야 밝히는 총선 폭풍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선거 날.


분명 여당의 참패가 예상됐다.

심란해하는 남편을 꼬셨다.

“관악산이나 다녀오는 거 어때? ”

“그래. 실컷 걷고 오자. 당신은 굳이 투표 안 해도 돼. ”

“아냐, 6시 전까지는 와야지. 내 권리는 행사해야지.”

지더라도 한 표라도 줄여보자는

저 남편의 심보 안 봐도 알겠다.      


5시간이나 걸었다.

정권 바람을 꽤 타는 남편 직장 탓에 그가 힘들어질까 걱정이 앞섰다.

정치에 너무 의미 부여 말자,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일상을 살면 된다, 퇴직이 몇 년 남지 않았으니 마음을 비우자 같은 잔소리를 끝도 없이 하며 예방침을 마구 찔러댔다.      

산길을 걸으며 만개한 산벚꽃, 진달래를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다 숨어 있던 그놈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 치킨 두 마리 내기할까? 난 아무리 봐도 여당이 100석을 못 얻을 것 같아.”

“에잇,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해? 당신만 너무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거 아냐?”

“치킨 두 마리 돈 좀 나가겠네.”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예상 의석수 기준은 방송 3사 출구조사의 중간값을 기준으로 잡았다.     


두 딸은 엄마·아빠의 내기에 흥미를 보였다.

이게 웬 떡이냐며 어찌 됐든 치킨 두 마리는 보장됐다며 신나 했다.  

6시가 다가올수록 괜히 긴장됐다.

분명 치킨 두 마리 때문은 아닐 텐데 말이다.

네 식구가 TV 앞에 쪼르르 앉았다.

특집방송 중이던 앵커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10, 9, 8, 7, 6, 5.... 2,1,0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파란색과 빨간색의 숫자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헉!!

외마디의 탄성과 함께 온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와~! 대박!!! 엄마 승!! 아빠 패!”

작은딸이 팽팽한 긴장감을 깼다.

나와 큰딸은 미동도 않고 화면을 응시하는 남편을 보다 눈이 마주쳤다.  

아, 이거 분위기 장난 아니다.

“여보, 내기는 없던 거로 해. 치킨은 그냥 내가 살게.”

가타부타 대답도 없다.

“이 분위기 어쩔!”

작은딸은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큰딸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아빠 진짜 충격받았나 봐.”

“그러게. 괜히 내기는 해서. 내가 미쳤지.”     


잠시뒤 치킨이 도착했다.

하나 먹어보라는 말에도 TV 앞에서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남편.

채널을 돌려가며 다른 방송 출구조사도 체크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부러 큰소리로 분위기 전환시켜 봤다.

“여보~~! 우린 밥 먹자.”

“나, 밥 안 먹어.”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남편.

닭다리 뜯던 큰딸이 웃으면서 한마디 했다.

“아빠, 선거 졌다고 식음 전폐하는 거야?.”

“안 먹어. 입맛도 없어.”

속상하다고 곡기를 끊는다고?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다가도 오죽하면 저러나 싶다.

밥상을 차리다 말고 남편 옆으로 갔다.

“아니, 그게 뭐라고 밥을 안 먹어? 그러지 마.

오늘 종일 산 타며 그렇게 예방주사를 놨건만 소용이 없네.”

“이민을 가야겠어.”

“뭐? 이민?”

아이고야, 이제 이민까지 나오는구나.      


정치가 내 삶에 이렇게 영향을 끼칠 줄 몰랐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다수의 의석을 어느 당이 차지할지 스포츠 관전하듯 보며 살았다. 젊은 날 길거리 시위에 나갔던 것은 좋아하는 동기들과 선배들을 따라서였다. 첫 직장에서 사주와 척을 지는 노조 일을 했던 것도 친했던 동료들 때문이었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 말도 맞아 고개 끄덕이는 나는 전형적인 회색분자다. 그래서인지 너무 정치색이 선명한 사람은 내심 불편하다. 그런데 나랑 같이 사는 남편이 그랬다. 20대에 만난 그는 누구보다 정의를 부르짖고 기득권을 비판하던 사람이었다. 윗사람에게 대들기 일쑤여서 늘 사표를 내던질 각오로 행동했다. 그런데 직급이 올라가고 여차여차한 상황들이 사람을 바꿔놓았다. 직장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괴로워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나도 애가 탔다. 선거 결과가 실망스럽다며 이민까지 생각하는 남편을 보니 그 말이 진심은 아니라고 믿지만 착잡했다.      


잠시 뒤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온 남편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어떤 상황에도 감정이 요동치면 그 당사자도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도 너무 힘들다고, 속은 시끄럽겠지만 바람 불어도 큰 나무가 덜 흔들리듯 든든한 어른이 되자고. 산책이라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라고 달랬다. 밥 한술을 간신히 뜬 남편은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을 걷고 들어와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내 코까지 골며 잠든 남편.

정작 남편은 잠이 들었는데 내가 잠이 안 왔다. 오후에 먹은 밀크티 때문이지 뭣 때문인지 눈만 말똥말똥해졌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수시로 TV를 켜 가며 엎치락뒤치락하는 후보들의 개표 레이스를 지켜봤다. 개표 윤곽이 거의 드러나고 새벽 4시쯤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유명한 책의 제목처럼 건전한 보수의 가치도, 진보적 가치도 필요하다고 믿는다. 두 세력 간의 경쟁과 견제가 균형을 이룰 때 발전한다고 배웠다. 끝도 안 보이는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이 일반 서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하고 송두리째 흔들지는 말았으면 하는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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