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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롱쌤 Jul 07. 2024

무엇이 중헌디!

“지금 예준이와 리우가 뭔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쉬는 시간, 우재가 다가와서 내게 귀띔했다. 우재는 차분하고 생각이 깊다. 그래서 우리반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도 친구들도 자주 찾는다. 우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보니 사안이 꽤 복잡한 것 같다.  

    

두 아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본다. 리우는 우리반 통계청 직원이다(우리반은 경제교실을 운영 중이다. 각자의 직업이 있고 매달 월급을 받아 생활한다). 통계청 일은 매일 친구들의 독서 시간을 체크하고 배움노트 제출을 확인하여 O, X를 기록하는 것이다. 문제는 예준이가 배움노트를 집에 가져가서 작성하고 리우에게 따로 얘기하지 않아 거의 몇 주째 X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급기야 예준이의 신용등급이 몇 주 만에 1등급에서 5등급까지 하락했다. 예준이 노트를 살펴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빼곡히 노트정리가 돼 있다. 물론 담임인 나의 하트 확인도 없었다(사실 며칠 전 예준이는 내게 노트를 가져와 하트 표시를 요구했지만 그날 하루치만 확인해 주고 그전에 것은 해주지 않았다). 예준이는 억울했는지 통계청 직원에게 등급 조정을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리우는 다음날 8시 40분까지는 제출하는 게 규칙이라는 말과 원칙대로 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음, 너희들 두 명 입장을 알겠어. 선생님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사실 좀 헷갈리는데 이 문제 반 전체 친구들 의견 들어보며 판단해 보는 건 어떨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아이들. 마침 국어시간이라 우리가 배웠던 토의를 간단히 실습해 보자고 했다. 간단히 두 친구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너희들은 어떤 생각이냐고 물었다. 

대부분 둘 다 입장이 이해 간다고 했다. 어쩌지? 어쩌지?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손을 번쩍 든 건 젤 뒷자리 민혁이었다.      

“저는 선생님께서 늘 배움노트 쓰는 건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 생각났어요. 공부시간에 배운 걸 한 줄이라도 쓰면서 정리하고 기록하는 게 의미 있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노느라 안 쓴 친구도 많은데 집에 가서 잊지 않고 썼다는 게 중요하잖아요. 지금까지 X 친 것 다 O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 누구집 아들인지 저 똑 부러지는 말솜씨 좀 보시라. 교사지만 감탄하며 들었다. 꼭 내가 잘 가르쳐서 요러코럼 말을 잘하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앞자리에 앉은 준영이가 엉덩이까지 들썩이며 손을 들었다. 

“예준이가 억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아이들 상황을 다 봐주다 보면 통계청 일을 하는 리우가 너무 힘들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아침에 제일 일찍 와서 배움노트 체크하며 나눠주느라 고생합니다. 규칙은 지켜져야지 이렇게 하나씩 예외가 생기면 힘을 잃을 겁니다.”

아니 우리 준영이가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잖아? ‘수다쟁이’ 준영이의 재발견이다.

“하 미치겠네. 양쪽 다 너무 맞는 말만 해서 판단이 안 서요.”

앞자리에 앉은 윤서가 나를 쳐다보며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답해했다. 

몇 명의 아이들이 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양쪽의 입장차만 뚜렷하게 보여주고 좀처럼 해결책이 아이들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한마디 해도 될까?”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빨리 지혜로운 판결을 내려달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싫고 그럴 능력도 없다. 

“우리 학기 초부터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배웠잖아. 원칙들을 적어서 교실벽에 붙여놓기까지 했어. 저거 보면서 해결책 아이디어를 얻는 건 어떨까?”

그때였다. 솔로몬 우재가 발표했다. 

“4번째 원칙 ‘승승(勝勝)을 생각하라’를 적용해 보는 게 어떨까요? 어느 한 명이 ‘패’하는 해결책 보다 둘 다 이기는 방법요. 예를 들면 1등급에서 5등급까지 내려간 예준이는 시간 약속을 안 지켰으니 반 정도만 등급 상향을 해주는 거지요. 대신 리우가 지금까지 쓴 통계표를 수정하면 너무 힘드니까 통계표는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요.”

모두 우재의 해결책에 오호~ 하는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예준이와 리우는 표정이 안 좋았다. 특히 리우는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가 떨렸다. 

“선생님, 저는요. 요즘은 정말 애들 항의도 한 번도 받은 적 없이 최선을 다해서 내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신용등급 조정을 하는 게 뭔가 내 잘못을 인정하는 것 같아 속상해요.”

결국 리우가 눈물을 흘렸다. 그때였다.

“리우야, 통계청 직원은 네가 지금 최고로 잘하고 있어. 누가 해도 너보다 더 잘할 수는 없어. 나라면 진즉에 통계청 일 그만뒀을 거야. 맨날 애들이 뭐라 해도 견뎌내고 이겨내서 최근엔 불만이 거의 없었잖아. 너 탓하는 게 아니고 문제를 좋게 해결하려고 하는 거야.”

캬~ 늘 똑 부러지는 채민이, 쟨 어쩜 이토록 멋진 공감을 해줄까?     


이쯤 해서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교사가 개입했다. 지금껏 얼마나 리우가 열심히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리고 선생님의 경제교실도 결국엔 배움의 장을 조금 더 의미 있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명을 해줬다. 누굴 힘들게 해서 벌주고 수치감을 주기 위한 게 아니라고. 매일 독서를 하며 노트정리를 하며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게 목적이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걸 도와주기 위해서 신용등급이 있고 각종 혜택을 주는 거라고. 이런 상벌 없이도 6학년, 중학생이 돼서도 스스로 독서하고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는 게 선생님의 목표라는 말도 했다.      

우재의 중재안을 받아들여도 괜찮겠냐고 리우와 예준이의 의사를 물었더니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예준이에게 부탁했다. 이렇게 공식적인 반 토의까지 했으니 칠판에 ‘집배노(집에서 배움노트 써오는 사람’)에 이름을 꼭 적고 다음날 리우에게 꼭 확인받으라고. ‘무엇이 중헌디’도 소중하지만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말을 알쏭달쏭하게 덧붙였다.      


매일 교실에서 맞딱들이는 크고 작은 상황을 배움의 장으로 삼는 게 나의 교실 운영의 원칙이다. 열두 살 수준만큼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말이다. 아이들의 갈등은 늘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걸 피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힘을 길렀으면 좋겠다.      


사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정치판 소식을 볼 때면 저렇게 많이 배운 사람도 우리 열두 살 꼬맹이들보다 못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귀를 열지 않고 자기 얘기만 되풀이하며 평행선을 달리면 어떤 합의도 해결도 없다. 무엇이 중허냐! 승승을 생각하라! 더불어 행복하자! 

'행복'을 짓는 우리반 생일파티, 축하곡 연주 하는 아이들. 
생일자들이 촛불을 끄고 있다. 칠판에는 반 아이들이 스스로 체크하고 챙기는 매일의 삶이 빽빽히 적혀있다.

학교앞 우리반 농장에 토마토가 달렸다. 새 몇마리 날아와 쉬고 있다. 그걸 지켜보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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