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민족 발자취를 따라 걷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첫번째 이야기

by 포롱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여섯 살 무렵이었을까요.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큰집 제사에 따라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근엄하신 큰아버지가 아이처럼 노래하며 율동을 하셨는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노래가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언어, 일본어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다녔던 큰아버지의 기억 속 ‘일본’은 어딘지 친숙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배우게 된 한일 관계사는 ‘민족 감정’이라는 이름의 적대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 앞선 선진국 일본에 대한 호기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며, 언젠가 유학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제게 ‘가깝지만 먼 나라’, ‘싫지만 중요한 나라’, ‘닮은 듯 너무 다른 나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여행지로서 만나는 일본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교사로서 또 다른 고민도 생겼습니다. 아이들에게 ‘일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학생들 역시 극단적 혐오에서 막연한 동경까지, 일본을 향해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은 꼭 참여하고 싶은 연수였습니다. 이 연수는 1987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을 계기로 조선일보가 시작한 공익사업으로, 전국의 역사 교사들이 손꼽는 최고의 연수입니다. 다행히도 이번 참여자로 선발되어, 4박 5일간 일본의 역사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jpg 새벽 4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침략의 기억과 개척의 흔적>

비행기로 두 시간을 날아 도착한 후쿠오카 공항.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첫 방문지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였던 나고야 성터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영주들을 동원해 성을 짓고, 30만 대군을 이곳에 집결시켰습니다. 지금은 천수각의 흔적만이 남아있지만, 침략의 자신감과 패전의 허망함이 교차하는 역사적 공간이었습니다. 성터에서 바라본 바다, 우리가 ‘현해탄’이라 부르는 그곳은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고요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02.jpg 빈터만 남아있는 나고야성. 저 멀리 현해탄이 보인다.


이후 도착한 아리타 도자기 마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조선 도공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 도자의 시작을 연 인물, 도조 이삼평의 후손은 지금도 이곳에서 도기를 굽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당당히 드러냈고, 백자 기술이 유럽에까지 수출되며 일본 근대화의 자본이 되었다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기념비 앞에 섰을 때, 그 비가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안내에 숙연해졌습니다. 타국에 끌려와 살아야 했던 조선 도공들의 고향을 향한 마음이 전해져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03.jpg 도조 이삼평의 14대 후손(왼쪽)과 현장에서 역사강의를 해주시는 강원대 손승철 교수님.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04.jpg 아리타 도자기 마을의 주민들은 도조 이삼평을 기리며 기념비와 신사도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고대 교류와 공존의 기억>

둘째 날은 후나야마 고분을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신발, 귀고리 등은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고대 백제인의 흔적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 열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활발히 교류해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습니다.

요시노 가리 역사공원에서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청동기 유물과 함께, 우리의 세형동검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전시를 보며, 묘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05.jpg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백제 무녕왕릉과 흡사한 유물들

시모노세키의 아카마 신궁에는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1711년 조선통신사 임수간의 시를 소개해준 일본인 관리자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러나 신궁 바로 옆에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장소, 청일강화기념관이 있었습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며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10.jpg 아카마 신궁에 보관된 조선통신사 임수간의 시를 소개해주는 신궁 책임자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11.jpg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진 청일강화기념관


<역사, 문화, 그리고 사람>

이틀간 만난 일본인들은 모두 조용하고 친절했습니다. 청결하고 질서 정연한 거리, 전통을 간직한 시골 마을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습니다. 일본 문화는 흔히 ‘조화의 문화’라 불립니다. 튀지 않으려는 경향은 집단주의적 문화 속에서 ‘집단 따돌림’과 같은 문제로도 이어졌고, 그것은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기도 합니다.

반면, 급속히 근대화한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조직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두 나라의 근대화 방향과 역사 인식, 사회 구조에도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내해를 건너는 밤, 아기자기한 선실을 돌아보다 문득 세월호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생각났습니다. 구조가 비슷해서였을까요. 석양 속에서 그날을 떠올리며, 가슴 깊이 간직된 아픔이 조용히 밀려왔습니다. 배의 요동 탓인지 밤새 뒤척이다, 셋째 날 아침, 드디어 교토에 도착했습니다.

<계속>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12.jpg 일본 내해를 건너며 하룻밤 묵었다.
KakaoTalk_20250602_164811641_13.jpg 선상에서 바라본 일몰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낭독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