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대일본 교과서를 걷다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두번째 이야기

by 포롱

여행 셋째 날 아침, 우리는 고대 일본의 심장부, 나라로 향했습니다.

하루에 네 곳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빽빽한 일정이었지만, 각기 다른 색채를 지닌 공간들은 지루할 틈 없이 우리를 몰입시켰습니다.


살아있는 교과서를 걷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일본 화엄종의 본산, 도다이지.

절 입구, 나라 공원의 수천 마리 사슴 떼가 어슬렁거리는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한글 이름표’를 단 우리 일행에게 일본 중고생들이 다가와 “안녕하세요!” 하고 수줍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단정한 교복 차림, 화장기 없는 여학생들. 낯설지만 친근한 그 얼굴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십여 년 전과는 다른 분위기. K팝과 K드라마가 일본 청소년 문화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실감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면, 두 나라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도다이지 대불전은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며, 그 안에는 무려 15미터, 500톤 규모의 청동 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일본인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는 이 거대한 불상 역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뿌리와 닿습니다. 설계와 조성을 진두지휘한 양변 스님은 백제계 씨족 출신이고, 그는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인 행기 스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네요.

높디높은 지붕 아래 위엄 넘치는 대불 앞에 섰습니다. 시커멓고 거대한 눈빛의 불상이 이방인의 알량한 문화적 우월감을 꾸짓는 듯 해 움찔했습니다. 경내를 얼른 빠져 나왔습니다. 대불전을 감싸는 이월당과 삼월당의 편안하고 익숙한 지붕 곡선을 보자 이내 편안해졌습니다.


고구려의 붓질이 머문 사찰

다음 여정은 교과서에서 수없이 보았던 호류지.

고구려 화가 담징이 그렸다는 금당 벽화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5층 목탑이 이곳에 있습니다.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요.

금당 벽화는 1949년 수리 중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지금은 복원된 벽화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채색 기법과 구도, 화면 구성은 분명히 한반도에서 건너간 화공들의 손길을 짐작케 합니다. (사진 촬영은 엄격히 금지돼 있었습니다.)

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 문득 7세기 백제 사찰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백제의 땀과 고구려의 설계가 서린 아스카테라

세 번째로 향한 곳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진 아스카테라.

'일본서기'에 따르면, 588년 백제가 부처의 사리와 함께 승려와 기술자들을 파견해 세운 절입니다. 두 차례의 낙뢰와 화재로 현재는 본당만 복원되어 있지만, 금당이 세 개나 나란히 배치된 독특한 구조는 고구려 양식의 영향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이 절의 금동 석가여래상은 일본 내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수덕사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안내문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흔적’으로 가슴이 뿌듯합니다.


고구려의 벽화를 걷다

마지막 답사지인 다카마쓰 고분.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고분 안에는, 놀랍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신도 벽화가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그 모습은 수신리 고분을 떠올리게 할 만큼 닮아 있었는데요.

형형색색의 고대 문양 앞에 서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앵무새처럼 읊었던 문장들이, 생생한 감동으로 가슴을 두드립니다.


생경한 차분함, 이성적인 풍경

다음 날, 고속도로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목격했습니다.

앞서가던 트럭에서 불길이 솟구쳤고 시커먼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두 시간 넘게 한자리에서 꼼짝도 못했지만, 주위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그 흔한 경적 소리 하나 없이 말이죠.

그 순간, 이어령 선생의 ‘축소 지향의 일본인’을 떠올렸습니다.

일찍이 이어령 선생은 축소와 확대라는 이분법으로 일본 문화를 범주화했습니다. 부채, 분재, 도시락으로 상징되는 그들은 '축소’함으로써 세계의 강자가 되었지만 임진왜란, 세계 2차 대전 등 밖으로 ‘확대’해 가려할 땐 여지없이 패망했다고 분석했죠. '도깨비' 말고 '난쟁이가 돼라'라고 한 대학자의 충고가 일순 돌변할 수도 있는 그들을 늘 경계하라는 말로도 들렸습니다. 역사의 기억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들에게 짓밟힌 과거의 아픔이 자꾸 살아나 차분하고 이성적인 일본인이 참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반가사유상 앞에서

결국 이 사고 여파로 오전 일정이었던 에도 막부를 연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화려한 별궁 니조성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류지에서 마주한 목조 반가사유상 앞에서는 모든 아쉬움이 잦아들었습니다.

고요한 미소, 자비로운 자태. 신을 닮은 그 조각상은, 정지된 나무속에 생명이 깃든 듯했습니다.

한 일본 학생이 불상에 입맞춤하려다 손가락을 부러뜨렸다는 에피소드는 익살스러웠지만, 복원 과정에서 이 불상이 한반도에서 자라는 춘양목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금동 미륵반가사유상과 너무도 닮은 조각상 앞에서, 깊은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고대 한일 문화가 긴밀히 교류했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천년을 건너, 오사카에 서다

마지막 행선지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였습니다.

고층 빌딩 숲, 양복 입은 샐러리맨들의 행렬, 자유로운 관광객들.

한적한 절과 무덤 사이를 걸었던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단숨에 건너온 것처럼, 세상이 한 페이지 넘어간 느낌이라면 이해하시겠지요.


여운과 물욕 사이

매 끼니 접한 일본 밥상은 익숙하면서도 금세 질렸습니다.

짭조름한 간과 단출한 반찬 탓에 매번 물을 들이켜야 했습니다.

그 또한 덥고 습한 섬나라의 생존 방식일지도 모르죠..

‘물욕 없는 사람’이라 자처하던 제가,

일본의 ‘잇쇼켄메이’ 정신, 즉 혼신의 힘을 다해 하나의 것을 완성해 내는 태도에 빠져

가게에 들어갈 때마다 자꾸 뭔가를 사고 말았습니다.

앙증맞은 디자인, 단단한 마감, 사소한 정성들.

역사 탐방이라는 본분은 잠시 잊은 채, 허당기 가득한 아줌마의 여행은 그렇게 계속됐습니다.


여행의 묘미는 언제나 우연 속에 숨어 있다고 합니다.

이번 여정은 단순한 답사를 넘어,

이웃의 역사 속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그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한 명의 여행자로서,

그리고 이웃으로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민족 발자취를 따라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