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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재미는
'사람'과 '쇼핑'?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마지막 이야기

by 포롱
“옆자리 앉아도 되나요?”
낯선 여행길에서 건넨 이 한마디가 4박 5일의 시간을 이렇게 따뜻하게 물들일 줄 몰랐다.


조선일보사 주최 ‘일본 속 한민족사 탐방’ 이라는 교사 이름표를 달고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하자 주차장에는 여섯 대의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한국의 선생님들이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번호를 확인하느라 늦게 버스에 탔다. 이미 앞자리는 다 찬 뒤라 뒤쪽으로 향했다. 덩치 큰 남자 선생님 옆에는 앉기 망설여져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한 젊은 선생님께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다면… 옆자리 앉아도 되나요?”

고개를 돌려 환하게 웃으며 맞아준 그녀. 그렇게 나는 지*쌤과 단짝이 되었다.


나이 들수록 처음 보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일이 쉽지 않다. 말 한마디에도 조심스러워지고, 괜히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데 그 어색함을 단숨에 허문 사람이 수*쌤이다. 짧은 머리에 선한 인상, 일본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와서는 툭 내뱉는다.

“특별할 줄 알았는데, 뭐 별거 없네요. 맛없어요.”

시크하면서도 솔직한 말투에 웃음이 났다.

그날 밤, 놀랍게도 그녀와 나는 룸메이트가 되었고, 홀로 방을 쓰게 된 지*쌤을 챙기며 자연스럽게 ‘삼총사’가 되었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09.jpg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사찰을 거닐고 있던 일본 여성들

후쿠오카에서 첫날밤, 호텔 창밖으로 바다가 흐르고 테이블 위엔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봉지가 쌓였다.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이란, 설렘과 두려움, 기대와 그리움을 누구와 나누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11.jpg 훗쿠오카의 첫날밤을 묵었던 숙소.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좋은 곳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됐다. 유적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선생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강사의 말 한마디, 문화재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눈빛. 누군가는 메모를 했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으며 수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지*쌤은 유독 눈에 띄었다. 일주일 전 발목을 다쳤다던 그녀는 절뚝거리면서도 하루에 2만 보 넘게 걸었다.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교단에 서는 일이 설렌다는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젊은 교사로서의 외로움과 부담도 털어놓았다. 낯선 서울살이, 폐쇄적인 조직 문화 등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01.jpg 지*쌤과 오사카성에서 한 컷.

수*쌤은 어떤 상황이든 유쾌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행동도 말도 어찌나 재밌는지 진지한 선생님 집단을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유머라는 게 삶을 관조하는 자만의 특출한 능력임을 아는 나는 그녀가 늘 부러웠다.

우리 셋은 정말 잘 웃었다.

편의점에 갈 때마다 “이건 꼭 사야 해!”를 외치고, 서로의 가방에 과자를 넣어주며 장난을 쳤다. “녹차 과자는 안 사면 평생 후회할걸?” 서로 경쟁하듯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나왔다. 점심도 후딱 먹고 마트로 달려가면서 우리 왜 남의 나라까지 와서 이러냐며 웃었다.

여행이라기보다 수학여행 같았고, 선생이라기보다 여고생 같았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02.jpg 탐방 내내 환상의 짝꿍이 됐던 우리 셋.

넷째 날,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드디어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셋 다 ‘극 P형’이라 계획은 진작에 무용지물이었다. 정처 없이 걷다가 어느새 쇼핑에 빠져 옷을 사고, 또 두리번거리다 동전파스를 사고 안약을 샀다. 짐은 자꾸 늘어갔지만 마음만은 신났다.

그러다 줄을 길게 선 초밥집 앞을 지나다 약속이나 한 듯 외쳤다.

“여기다!”

한 명은 줄을 서고, 둘은 길가에 앉아 쉬기를 번갈아 하며 들어간 맛집.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초밥 한 점에, 그날의 피로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밤에는 다시 숙소에 모여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눴다. 누군가에게 처음 꺼내는 마음, 상처도 드러내니 별것 아닌 것 같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며 참 잘 살아왔고 잘 살 것이라며 서로를 위로해 줬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08.jpg 오사카 도톤부리 쇼핑후 스시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별궁 드넓은 오사카성에서 우리는 가장 황당한 실수를 했다. 천수각 위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넋을 놓고 있다가, 출입구를 착각해 반대편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성을 가로질러 돌아오니, 여섯 대의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넘긴 뒤였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결국 또 깔깔 웃었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_10.jpg 일본의 편의점과 상점을 수시로 드나들며 쇼핑을 하던 우리들.

인천공항에 도착해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지던 날.

가볍게 손을 흔들고 돌아섰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미치도록 웃고, 걷고, 떠들었던 꿈같았던 타국에서의 봄날.

일본의 고대 유적과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밟은 일도 뜻깊었지만,

그보다 더 깊이 남은 건,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맺은 인연이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풍경도 사색도 좋지만 사람이 남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KakaoTalk_20250613_154326842.jpg 빽빽한 일정 가운데에서도 뿌듯하게도 사람도 남고 물건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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