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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꼴찌 조카의 수능

"수능 안 봐요" 떡 대신 용돈 주세요...

by 포롱
“이모, 안녕하세요.”

뜬금없이 조카에게 카톡이 왔다.

이모와 조카 사이라지만, 서울과 대구만큼이나 거리감이 있는 관계였다.

어릴 적엔 바쁜 언니 대신 방학마다 일주일씩 데리고 있을 만큼 예뻐했지만,

사춘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입을 꾹 다물던 아이.

일 년에 두어 번 만날 때마다 훌쩍 커 있어 늘 낯설기만 했다.

그런데 그 조카가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오, 우리 **이! 잘 지내니? 곧 고등학교 졸업하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더니, 조카가 대뜸 그런다.

“이모, 졸업선물 안 주나요?”

…엥?

고등학교 졸업하려면 아직도 몇 달 남았는데, 선물 고지서를 떡하니 들이민다.


“뭐 갖고 싶어? 말해봐~”

사춘기가 끝났나?

어릴 때 이모 손을 잡고 찰싹 붙어 다니던 개구쟁이가

다시 돌아온 듯 반갑다.

그런데 조카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보낸다.

“고3이면 아실 텐데.”

아, 수능!

떡을 왜 안 보내냐는 신호인가 싶어 급히 답장을 보냈다.

“안 그래도 찹쌀떡 보내려고 했어.”

그런데 돌아온 답장은 단 한 글자.

“흠.”

… 이게 아닌가 보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KakaoTalk_20251116_130255240_01.jpg 광화문 신문로 '수류산방'에서 만난 이진경 작가의 작품

우리 조카는 수능을 안 본다.

공부는 ‘전교 꼴찌’, 성격 좋기는 ‘전교 1등’이라고 언니가 늘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방학마다 데려다 온갖 감언이설로 꼬셔도

책상 앞에 앉으면 눈이 풀리던 아이였다.

언니도 일찌감치 마음을 비웠고,

공부보다 운동시키며 “몸과 마음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로만 크라”고 했다.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들어가

과외 대신 제빵 기술, 기계 설비 같은 실용 기술을 익혔다.

그런 조카에게

내가 ‘찹쌀떡’ 얘기를 한 게 민망해져 수습할 멘트를 고민하고 있을 때

조카가 짧게 답을 보냈다.

“고맙습니다.”

마지못해 보내는 티가 팍 난다.


결국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아유, 찹쌀떡은 무슨! 절대 보내지 마라.

수능도 안 보면서 떡값 챙기려나 보다.

그놈 아주 상여우야.”

그러면서 근황을 알려줬다.

조카가 현장 실습을 나갔다가 어떤 교수님과 친해졌는데,

그 교수님이 조카에게 대학 진학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공부 꼴찌인데도 받아주는 대학이 있나 봐. 신기해 죽겠다.”

예전엔 문턱이 높기만 했던 대학들이

지금은 학생 유치하느라 서로 경쟁하는 세상이란 말을 나누며

언니와 한참을 웃었다.

통화를 마치고

‘수능 떡값’이 아닌 응원 용돈을 보냈다.

곧장 메시지가 쏟아졌다.


“오예!!”

“사랑합니다 이모!”

나는 모른 척, 의례적 덕담을 보냈다.

“시험 잘 봐라~”

조카가 곧바로 답문을 보냈다.

“그런데 이모, 저 수능 안 보긴 해요.”

아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건가 싶어

서둘러 말했다.

“수능 안 보고 대학 가는 게… 그게 진짜 능력자지!”

조카가 “하하,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며 대화는 끝났다.

KakaoTalk_20251116_130255240_02.jpg

수능이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응원 메시지와 작은 선물이 오간다.

누구네 아이는 현관문 들어서면서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고,

어려워진 난이도에 앞이 안 보인다는 부모의 한숨도 들린다.

나 역시 두 딸과 그 시기를 지나왔다.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무력한 순간인지 너무 잘 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깨달았다.

수능은 그들이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좌절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그 관문을 잘 통과하든 못 통과하든

삶은 계속 도전과 실패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이의 현실과 기대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여 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옆에서 지지해 주는 것뿐이다.


십여 년 전, 사고뭉치 귀염둥이 조카의 모습이 떠오른다.

서울 지하철을 처음 타던 날,

흥분한 나머지 개찰구를 지나기도 전에 달려들다

바에 걸려 나뒹굴던 장면.

크게 다치지는 않았나

놀라서 심장이 쿵 했는데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툴툴 털고 일어섰다.

그 천진하고 당당했던 모습을 생가하니 웃음이 난다.

그런 아이가 이제 성인의 문턱에서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수능 안 보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괜한 걱정을 했나 싶다.

조카는 담담하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데 말이다.

행복의 지수는 ‘소유/ 욕심’이라는 공식이 있다.

소유를 늘리기 어렵다면 욕심을 줄이면 된다.

오늘 그 공식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요즘 계속 어지러웠던 마음 속에서 뭔가가 하나 톡 떨어졌다.

욕심을 접으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조카 덕분에 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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