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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말 한 마디

내가 고구마로 보여?

by 포롱

며칠 전부터 남편이 좀, 아니 꽤나 얄미웠다.

환절기만 되면 감기를 달고 사는 마누라를 챙기기는커녕 슬금슬금 피하더니

급기야 이불까지 들고 거실로 대피했다.

이유는 딱 하나.

“연말에 중요한 일정이 많아. 나는 아프면 안 돼.”

아주 그냥, 나를 바이러스 덩어리로 취급했다.

몸은 아픈데 할 일은 쌓여 있고, 예민함이 절정으로 치닫던 때라 더 서러웠다.

예전엔 약 세 알 먹으면 거뜬해졌는데, 요즘은 병원 두세 번은 기본이고

주사·영양제까지 맞아도 도통 나아질 기미가 없다.

아, 가을은 깊어가고, 삭풍은 코앞이다.

남산도서관 앞 막바지 단풍


토요일 오후 1박 2일 일정을 마치고 집에 오니, 아니나 다를까 집이 난리였다.

설거지는 산처럼 쌓여 있고, 해둔 음식은 냉장고에 넣지도 않아 상해 있었다.

놀다 온 사람이 크게 얘기하기도 뭐해서 그냥 넘겼다. 속으로만 ‘역시나’ 하며.

낭독수업 준비를 하다 늦은밤, 방에 들어갔더니 남편이 침대에 누워 있다.

“아직 감기 안 나았는데? 당신 거실 가서 자.”

말투에 독기가 묻었는지 남편이 곧장 딸들에게 외쳤다.

“현아, 진아! 아빠 거실에서 자도 돼?”

“안 돼!!! 아빠 때문에 TV도 맘대로 못 보고 불편해. 그냥 들어가!”

딸들의 대동단결. 나는 슬쩍 웃음이 났다.

남편,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내 입으로는 말하기 싫으니 애들 입을 통해서 정리하겠다’는 그 교묘한 수.

아오, 진짜.

괜한 트집 같아 그냥 넘겼다.

부부가 달면 삼키고, 쓰면… 일단 참는 사이니까.

남산에 새로 생긴 하늘숲길.

새벽 낭독 수업이 부담됐는지 몇 번을 깨서 시계를 봤다. 새벽3시, 4시, 5시!

결국 포기하고 일어나는데, 남편이 비몽사몽 말한다.

“고구마 좀 삶아줘. 회사 가져가게.”

순간 빡 쳤다(?)!

“지금 몇 신 줄 알아?”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랐고, 남편은 더 놀라 되묻는다.

“몇 신데?”
“새벽 5시!”

내가 고구마로 보이나. 수업 준비하려는 마누라한테 할 말인가,

‘당신 손은 어디에 쓰나’ 이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켰다.

한번 쬐려 보고 나갔다.

맨날 투닥거리는 부부지만 사과는 발빠르게 한다.

수업을 하고 있는데,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7시를 조금 넘긴 시간.

일요일 아침 늦잠이 인생의 낙인 남편이 이 시간에 일어난다는 건…

아, 단단히 화났네, 화났어.

30년 가까이 살다보니 그의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기압을 알 수 있다.

오늘 새벽, 그가 그어놓은 선을 내가 넘었나보다.

남산 트레킹 후엔 꼭 들러야 하는 음식점이 있다. '목멱산방'

곧이어 시작된 설거지 시위.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평소의 1.7배쯤 컸다.

잠시 뒤 오븐기가 윙— 돌아간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나 열받았어’ 열기가 작은방까지 느껴졌다.

곧 군고구마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들어온다.

‘당신 안해줘도 내가 한다!’는 메시지가 고구마 향에 실려있다.

선생님들과 수업 마지막 인사를 하며 활짝 웃었다.

“선생님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렇게 상냥한 말을 젤 가까운 남편한테도 좀 하지 하며 속으로 반성했다.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음식점 '목멱산방'.

방에서 나오니 남편이 힐끔 쳐다봤다.

먼저 화해의 손짓을 건넸다.

“새벽에 화났지? 짜증내서 미안해. 좀 까칠했지? ”

“내가 참 치사해서, 잠이 확 달아났네.”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새벽엔 서로 조금씩 미친다. 내가 미친 이유를 조목조목 솔직하게 얘기했다. 너무 찌질해서 창피하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하는 마음으로 속을 뒤집어보였다. 뾰족하던 그의 마음이 풀린다. 그는 훤한 이마만큼 마음도 넓은가보다.


아침으로 들큰하고 고소한 들깨 배추국을 먹었다.

남편은 예산 어쩌구저쩌구 하며 스트레스를 한껏 받고 있었고,

나는 ‘퇴직 몇년 안 남았는데 대충 좀 하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삼켰다.

하고 싶은 말을 참을 줄도 알아야지.


훈훈하게 끝나는 줄 알았다.

남편이 과일 몇 개를 들고 깎기 시작한다.

“아무리 바빠도 딸들 과일은 내 손으로. 감은 현이, 배는 진이.”

그러더니 갑자기 며칠 방치돼 갈변한 곯아빠진 사과 두 조각을 내 앞으로 쓱—

“당신은 이거 먹어.”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남편이 얼른 “농담이야, 농담~” 하며 뒷수습을 시작했다.

참 말 예쁘게 한다.


그래도 따끈한 고구마와 에그타르트와 과일을

도시락에 담아 남편 손에 쥐여 내보냈다.

일요일 아침 이 정도면… 우리 집은 오늘도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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