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덩어리' 말고 '사람'을 보라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

by 포롱

암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가 말했다.

“이불에 실수했다. 이제 어떡하냐. 큰일이다.”

그때 엄마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것을 단순히 좌절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복잡한 표정이었다. 미안함과 수치심, 당혹감과 체념이 한꺼번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 지독한 암은 결국 엄마의 뇌까지 망가뜨렸고, 숟가락조차 들지 못하게 했다. 엄마는 풍이 온 것 같다며 한의원에 가서 고쳐야겠다고 말했다. 몸이 무너져가는 순간에도 엄마는 여전히 ‘살아가던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이해하려 했다.

암환자를 곁에서 지켜봤고, 결국 그를 떠나보낸 내게,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는 특별한 책이었다. 처음에는 심장마비와 암을 두 번이나 이겨 낸 한 사람의 극적인 생존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적의 서사가 아니라,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무엇인지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묻는 기록에 가까웠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을 보지 않고 ‘아픔’만 본다고. 병을 중심에 놓고 사람을 그 뒤로 밀어낸다. 그러니 환자는 어느새 치료의 대상, 관리의 대상, 설명되어야 할 대상으로 축소된다. 우리는 아픈 사람을 이해하려 하면서도, 끝내 ‘사람’을 놓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병보다 먼저, 사람으로서 무너진다.


젊고 푸르렀던 시절 이 책을 만났다면 이런 구절들을 머리로만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읽었다. 예전에는 열두 시간을 걸어도 끄떡없던 관절이 어느 날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다 집안일을 많이 한 다음 날이면 손가락이 붓는다. 안경 없이는 독서가 어려워졌다. 아직 환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 예전의 몸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병을 앓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됐다.


사람은 모두 늙고 병들고 죽는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인데 우리는 자주 잊거나 외면한다. 그러고보니 젊고 건강한 몸만을 칭송하고 숭배하는 사회의 분위기는 낯설 정도로 기괴하다. 누구나 결국 질병과 죽음의 문턱 앞에 서게 되는데도, 마치 그것이 일부 불운한 사람들의 일인 양 밀어내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묻는 동시에, 결국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책 속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우리는 몸을 자꾸 고쳐야 할 기계처럼 여기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대상처럼 다룬다. 그러나 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몸은 삶 그 자체가 지나가는 자리다. 아픈 몸을 살아낸다는 것은 병에 굴복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몸으로 여전히 나의 삶을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아픈 몸을 살아내기”란 포기가 아니라 수용이고, 체념이 아니라 자기 삶의 회복이다.

작가는 아픈 사람의 책임이 단지 낫는 데만 있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고통을 목격하고, 그것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고, 영상을 찍고, 자기 목소리를 남기려 하는 이유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의 고통을 인간의 공통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질병에서 가치를 찾자는 목소리에 크게 공감한다. 암을 개인 당사자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 누구나 아플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그 고통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문명사회의 최소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캐나다 정부 의료보험이 세금으로 모든 시민의 치료비용을 댄다는 작가의 경험은 참 부럽다. 통장의 잔고가 줄어드는 걸 미안해하며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남겨 주고 싶어 치료를 거부했던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은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개인의 사랑과 사회의 책임이 충돌하는 않아도 되는 안전한 사회를 꿈꾼다.

요즘 죽음에 관한 강의를 찾아다니며 듣고 있다. 지인들은 재수 없게 왜 그런 공부를 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더 잘 살아보려고 공부한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조금 더 분명히 전할 수 있다. 질병과 죽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삶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주변의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도 같다. 결국 나 역시 언젠가 그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더 공부하고 싶다. 아픈 몸으로 살아내는 법을, 아픈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대하는 법을, 그리고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오늘의 삶을 더 찬란하게 사랑하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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