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손들어 보라. 당장 면담을 요청할 것이다. 제발 나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물론 하루하루가 모두 행복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 연차를 내도 울리는 내 휴대전화. 해가 뜨기 전 어둠 속에서 출근해 달을 보며 귀가하는 이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실장님들도 야근을 버티는데 내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다짐하며 3년을 견뎌왔다. 그런데 요즘 그 다짐이 자꾸 흔들린다.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질문이 맴돈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버티지 못하니?” “집은 언제 사고, 차는 언제 살 거야?” 끝없는 고민은 마치 궁지에 몰린 생쥐에게 “어디 한 번 도망쳐 봐라”라며 비웃는 고양이처럼 나를 조여온다.
돈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인스타그램에서 20대 평균 연봉과 30대 전에 모아야 할 자산 액수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내 연봉은 그 금액에 한참 미달이고, 통장 잔고도 빈 상태다. “30대에는 1억을 모아야 한다”는 글을 보고 있자니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안 되면 집도 못 사고, 사회 기준에 미달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누른다. 당장 내 인생이 망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상실감을 감출 수 없다. 대체 이런 기준을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한 연구에서는 물질주의 가치관이 한국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었는데,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도 높아지지만 물질주의 가치관은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돈을 삶의 주요 가치로 삼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낮은 행복감과 삶의 만족도를 느낀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는 소득 수준이 높아져도 물질주의 가치관의 부정적인 효과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를 보면서 왜 내가 행복하지 못한지 곱씹어 보니, 돈이란 가치가 내 삶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었다. 야근도, 쉬는 날 울리는 휴대전화도 참을 수 있지만, 제대로 된 금전적 대우를 못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조차 내 삶을 숫자로 평가하고 있었다.
혹시 나만 이런 마음으로 사는 걸까 싶어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대부분의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에서 나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정말 모두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모두가 괜찮다고 믿으며 버티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다들 이렇게 살아간다”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되는 생활이 정말 정답일까? 모두가 이렇다는 말에 나도 묻힌 채 살아가는 것일까?
유난히 힘든 날, 야근 후 회사 문을 나서며 빌딩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달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그래서 질문을 던져본다. “저 잘하고 있죠?” 그러나 달은 대답하지 않고 금세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매정한 현실은 또 내일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겠는가, 내일이 되면 다시 일어나야 한다. 알람이 울리면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스를 타고 회사에 도착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며 속으로 다짐한다. “불안하지 말자.”
가끔 이 다짐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불안하다. 오늘도 야근 후 새벽 1시 동부간선도로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택시 창밖에 흐르는 가로등 불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평소 같으면 기사님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귀가했을 텐데, 오늘은 말할 기운이 없는 걸 보니 조금 지친 듯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 지금 잘하고 있지?” 답이 없어도 계속 그렇게 다짐하며 달려간다. 택시에서 내리며 생각한다. “아직은 괜찮겠지.”
궁지에 몰린 쥐는 탈출구가 없다면 고양이를 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탈출구가 있는지 곁눈질로 찾고 있다. 그 문턱을 넘으면 행복해질 것만 같은 기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