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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곰 Nov 12. 2024

언어는 달라도 마음이 통한다는 증거

순례길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교감의 힘을 경험했다. 언어가 아닌 몸짓, 표정, 억양 같은 비언어적 요소들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 소통 수단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순례길에서 처음 만난 딘과 미쉘의 이야기를 통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피레네 산을 오르던 첫날, 호주 남자인 딘을 만났다. 훤한 머리와 하얗게 덥수룩한 수염, 둥그런 배가 인상적인 그는 처음부터 유쾌하고 상상력이 넘쳤다. “절벽에서 발을 헛디디면 동물들처럼 원을 그리며 휘리릭 떨어진다”고 말하며 손으로 원을 그리더니, 내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진지한 표정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걱정해 주는 건 맞겠지? 


딘은 프랑스 남자 미쉘과 함께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딘이 영어로 이것저것 이야기하는 동안 미쉘은 대부분 “허허” 웃기만 하고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딘에게 “미쉘이 알아듣는 거 맞아?”라고 물었더니, 딘은 크게 웃으며 답했다. “아마 못 알아들을걸? 그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도 딘은 하늘이 맑다느니, 구름이 예쁘다느니 하며 양팔을 벌려 미쉘에게 계속 이야기를 건넸다. 미쉘이 말을 못하는 벙어리는 아니였다. 가끔 프랑스어로 미쉘에게 질문하면 그는 웃으며 대답해주는 모습을 보아하니 진짜 영어에 약했던 것이다.


딘은 정말 제스처가 강한 웃긴 남자였다. 미쉘이 항상 발걸음이 빨라 딘의 앞서 걸으면, 딘은 내게 “미쉘은 우리의 관광 가이드야” 하며 한 손을 올려 깃발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유쾌하긴 했지만, 솔직히 일주일 정도 지나면 둘이 각자 다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나도 영어를 듣는 것은 가능하지만 말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외국인이 어법이 어색한 한국어로 “맛이 있어요, 이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문법이 엉망인 단어 조합으로 겨우 소통한다. 외국인과 대화하다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대화가 끊기면 괜히 무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가봐야겠다”며 대화를 포기한 적도 많았다. 마음속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교감이라 믿었기에, 그게 제대로 되지 않으면 답답함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일주일이 지나도 딘과 미쉘은 여전히 함께였다. 어느 날, 발걸음이 빠른 나와 미쉘은 체크인을 성공했지만 딘은 자리가 없어 다른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딘은 떠나면서 미쉘에게 “아침 5시에 이 숙소로 오겠다”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바닥을 가리켰다. 미쉘은 웃으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호기심에 5시에 그들을 기다려 보았는데, 정말 딘은 약속대로 숙소에 찾아왔고 미쉘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을 지켜보니, 두 사람은 30km를 걷는 날이면 5시에 출발하고 20km를 걷는 날은 6시에 출발했다. 둘의 조합은 이상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딘은 60세, 미쉘은 63세였다.


길을 걷다 갈림길이 나오면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순례길 가이드북을 보며 길을 찾았다. 핸드폰보다 책으로 길을 찾는 것이 더 편하다는 그들은 별다른 소통 없이, 책의 영어 문구를 읽는 딘의 말을 미쉘이 듣고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이라고 제스처만 할 뿐이었다. 마을에 도착해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딘은 미쉘을 기다려 함께 식사하려 했고, 식사 중에도 딘의 일방적인 말과 미쉘의 미소가 이어졌다. 심지어 오늘은 어디까지 갈 예정이냐고 묻자, 미쉘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가끔은 서로 아침을 사겠다고 나서며 돈을 꺼내는 모습도 따뜻했다. 딘은 한 손을 하늘 위로 올리며 “아니야, 내가 낼게. 돈은 넣어둬” 하며 미쉘의 지갑을 막았고, 미쉘은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지폐를 꺼내 주인장에게 건네며 커피머신을 가리켜 손가락 두 개를 폈다.


2주간 그들의 우정을 지켜보며 언어를 초월한 배려가 서로를 묶어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딘은 말이 많고 몸짓이 크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표현했고, 미쉘은 딘의 말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함께 웃었다.


이제는 나도 믿는다. 언어는 달라도 마음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을 하지 못해도 나의 몸짓과 표정, 그리고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교감할 수 있다. 딘과 미쉘처럼, 우리도 언어를 뛰어넘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장난꾸러기 말 많은 대머리 딘과 조용한 할아버지 미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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