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어디로 가는가? (2)

좀비의 도시 필라델피아

by Lee Sang Hoon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이다. 이틀 동안 방문할 곳이 여럿이라 재미교포가 운영하는 택시 서비스를 이용했다.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기사와 함께 했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팬데믹 이후의 물가 이야기도 많이 했다. 도중에 그가 거래하고 있는 한인 슈퍼마켓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아주 반가웠다. 이 슈퍼마켓은 내가 미국에 살 때 자주 가던 곳이다. 한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다. 지금은 사업이 커져 동부 지역에만 점포가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좀 있다고 한다. 점포의 일꾼 대부분이 '라티노'라 불리는 중남미에서 온 사람들인데 팬데믹 이후 일손이 너무 귀해졌다고 한다. 임금이 급등하고 심지에 출퇴근 차량 서비스도 기본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법 체류자인데 시정부는 보통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고 한다. 이들이 없으면 사업체 운영이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동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뉴욕과 보스턴과 같은 대도시의 서비스 업종은 대부분 라티노로 채워져 있었다. 호텔 카운터부터 하우스 키핑까지 호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우버 택시 기사도 대부분 라티노였다. 도시와 대학교내 보수공사도 대부분 그들의 몫이었다. 곳곳에서 스페인어가 들렸다.


이와 관련하여 트럼프 2기 정부의 이민자 정책이 떠오른다. 지금 행정부는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고 있다. 이는 미국 경제엔 골치 아픈 딜레마이다. 기본적으로 불법 이민은 합법적이진 않다. 따라서 정부가 이들을 막는 것은 정당한 조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은 미국 경제에 꼭 필요하다. 미국은 노동력이 부족한 나라이다. 그리고 지금 행정부는 제조업 부활에 사활을 걸고 있지 않은가. 많은 새로운 생산 시설을 운영하려면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현실은 더 많은 라티노들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했다. 푸근한 인상의 벤저민 프랭클린 아저씨는 여전히 벤치를 지키며 방문객의 사진 촬영에 응하고 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은 모교라기엔 MBA 과정인지라 학부만큼의 애정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아니면 필라델피아에 대한 다정한 추억이 많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말의 필라델피아는 암울했다.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필라델피아의 딱 그 느낌이다. 저녁의 다운타운은 어둡고 한적했다. 가끔 방문하던 뉴욕의 밤거리는 완전히 별천지였다. 유펜으로 불리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는 도심에 있다. 서쪽으로는 슬럼을 접하고 있다. 동쪽은 도심 중심부에 가깝다. 사실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은 강에 접해 있는 동쪽을 제외하곤 사방이 슬럼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도 지금 대학교 서쪽 지역은 이전보다는 좋아 보인다.


어드미션 오피스의 직원이 학교 소개를 했다. 그동안 들었던 여러 대학교 프리젠테이션 중에 내용이 가장 알차다. 역시 학교 명성 그대로이다. 유펜은 실용적인 단과대학들로 유명하다. 경영과 경제로 유명한 와튼스쿨, 아이비 대학에선 드문 간호대학, 미국 내 최상급에 속하는 법과대학이 있다. 공과대학도 뛰어나다. 모두 실용 학문이다.


캠퍼스 투어를 담당한 재학생의 배경도 재밌다. 필라델피아 출신의 흑인 여학생이다. 친절하고 붙임성 있게 캠퍼스 여기저기를 재미있게 소개한다. 캠퍼스 내 먹거리 얘기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한다. 그동안 교내 음식 관련 후생 복지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재학 중 대학과 연계한 프로젝트도 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는 입학 심사에 도움이 많이 된다.


유펜은 지역 출신 학생들을 많이 뽑는다고 알려져 있다. 나름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인 셈이다. 필라델피아 다운타운은 흑인의 비중이 굉장히 높다. 그들 다수가 저소득층에 속한다. 한때 필라델피아는 미국 내 비만율이 가장 높은 도시였다. 미국 국민의 비만과 소득과의 상관관계는 이미 연구로 입증되었다. 유펜은 지금도 슬럼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나름 지혜롭게 지역사회와 잘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역시 실용적이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의 건국 초창기에 잠깐 수도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미국 독립선언문이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 도심에 있는 인디펜던스 홀에서 거행되었다. 이곳에선 미국 헌법 서명식도 있었다. 독립선언문 발표와 함께 힘차게 울렸던 리버티 벨은 도시의 상징이다.


필라델피아에는 좋은 문화생활공간이 곳곳에 있다. 특히 뮤지엄 오브 아트는 아주 훌륭하다. 전시 작품도 상당이 광범하다. 미국, 유럽, 아시아에 걸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다. 시대도 중세에서 현대까지 다양하다. 고흐의 해바라기도 볼 수 있다. 이곳은 영화 록키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장엄한 영화의 주제곡을 배경으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미술관의 계단을 뛰어오르는 장면이다. 그리고 시원하게 펼쳐진 벤 프랭클린 파크웨이를 바라보면서 만세를 부른다. 미래에 다가올 승리를 미리 만끽하면서. 이후에 여러 속편이 나왔지만 록키 하면 누구나 이 장면을 떠올린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공연도 환상적이다. 미국의 5대 오케스트라 중 하나이다. 세계적인 거장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유진 오르만디가 거쳐 간 곳이다. 이들은 이 오케스트라를 세계 정상급으로 만들었다. 한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그들의 후임 리카르도 무티도 그 명성을 이어갔다. 나는 10달러 정도의 학생할인티켓을 구입해 연주회에 가곤 했다. 운 좋게 정경화 씨의 바이올린 협주도 가까이서 들었다. 전성기 때 그녀의 연주를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함께 볼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었다. 내가 졸업하던 해에 오케스트라는 정들었던 아카데미 오브 뮤직을 떠났다. 지금은 주로 킴멜센터에서 연주한다고 한다.


내가 도시에 머물 때 지휘자는 볼프강 자발리시였다. 그는 전임자들의 엄청난 명성에 다소 빛이 가려진 인물이다. 그에게는 좀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지휘 도중에 발을 크게 내디뎌 쿵 하는 소리를 자주 내었다. 다른 지휘자에 비해 유난히 소리가 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내에게 그의 이름에 딱 어울린다고 별로 웃기지 않는 농담을 하곤 했다. 자'발'리시!


필리즈와 LA 다저스와의 시합이 있는 날이다. 우리의 영웅 박찬호 선수의 선발경기다. 그는 이번 시즌에 무척 고전 중이다. 시즌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겨우 6승을 거두고 있다. 이전 몇 경기도 망쳤다. 이 당시 필리즈는 베터런스 스타디움에서 경기했다. 멀티구장으로 미식축구팀 이글즈와 같이 썼다. 그래서 경기장이 무척 컸다. 지금은 전용 구장인 시티즌즈뱅크 파크에서 경기를 한다. 삼성라이온즈파크의 모델이 된 구장이다.


우리는 1루 베이스 측에 있는 원정석 상단에 자리를 잡았다. 광적인 필리스 팬들의 악명을 고려한 현명하고도 소심한 결정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십수 명의 그룹이라 나름대로 큰 소리로 응원했다. 그 덕분인지 박찬호 선수는 그날 승리했다. 호투는 아니었지만 타선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날 이후 박찬호 선수는 완전히 반등한다. 남은 40여 일 동안에 무려 6승을 더 챙긴다. 그리고 그 시즌을 13승으로 마감했다. 다음 두 시즌도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리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천문학적인 장기계약을 맺는다. 이후는 다소 흑역사인 관계로 이 얘기는 여기서 맺겠다.


요즈음 필라델피아는 생각지도 못한 일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바로 좀비의 거리로 알려진 켄싱턴 구역 때문이다. 합성 마약인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공권력은 마비된 듯하다. 정말 종말적인 좀비 영화의 장면 같다. 옛날에는 조금 슬럼 같은 곳이었다. 지금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트럼프 정부는 원료의 원산지인 중국과 제조지인 멕시코를 압박하고 있다. 무역전쟁의 명분으로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때 이 지역을 지나다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로 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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