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
1994년 11월. 중국 웨이하이(위해) 향 인천발 여객선. 3등석 칸의 넓은 방에는 승객들이 뒤섞여있다. 침대도 의자도 공간의 구분도 없다. 그냥 아무 곳에나 짐 풀고 자는 구조다. 그때 중년의 사내가 나와 친구에게 관심을 건넸다. 그럴 만하다. 우리는 어리고 학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보따리상을 하러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히 눈에 띈다. 그는 대뜸 우리에게 중국에 뭐 하러 가는지 물었다. 우리는 중국을 알기 위해 40여 일 여정으로 전국 일주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철없는 생각이라고. 중국은 어린 너희에게 쉬운 곳이 아니니 웨이하이에서 내리거든 당장 귀국티켓을 끊어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옆에서 듣고 있는 몇몇 승객들도 한 마디씩 거들며 맞장구친다. 그들이 맞을 수 있겠다. 중국은 한국과 외교를 튼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우리에겐 미지의 영역이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오랜 기간 계획하고 준비한 여행이다. 방문할 도시들을 날짜별로 계획해 놓았다.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상세한 여행안내서를 손에 넣어 기차 시간표까지 짰었다. 중국어도 1년 정도 배웠다. 최대한 중국인 학생처럼 보이기 위해 옷까지 신경을 써 준비한 여행이다. 밤새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며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젊음의 혈기가 있었다.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웨이하이는 한국과의 짧은 거리로 당시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그것을 제외하고 딱히 둘러볼 건 없는 도시다. 실질적인 첫 목적지는 칭다오(청도)이다. 칭다오도 역시 해상교통의 요지다. 게다가 제조업도 제법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국기업도 꽤 많이 진출했다. 칭다오는 맥주로 유명하다. 한때 독일의 조차지였던 이유이다. 방문지에선 대부분 현지에 있는 대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방문객을 위한 숙소인 초대소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격이 아주 저렴하다. 그리고 현지 학생들을 만날 수가 있다. 청도에서 한 대학교의 초대소에 짐을 풀고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중간에 홀로 테니스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학생과 마주쳤다. 그는 단번에 우리가 외국인임을 알았다. 현지화 전략이 초장부터 실패했다. 바로 신발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나이키와 같은 외국 브랜드가 흔치 않았다. 우린 옷은 신경을 썼지만 신발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히 친절했다. 그리고 선뜻 우리를 그의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했다. 첫 일정부터 현지인의 집에서 저녁식사라 뜻밖의 횡재였다. 무엇을 먹었는지는 별 기억이 없다. 그리고 짐작건대, 우리의 각자의 나라, 여행 일정, 테니스, 학교생활 등에 관해 얘길 했을 것이다. 중국인은 관계 형성을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 특히 사업상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후에도 자주 경험하게 되지만 중국인들은 손님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고 관대하다. 그것을 첫 방문지에서부터 경험했다. 처음 본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는 호탕한 칭다오의 학생을 통해. 과연 '산둥하오한'이다! 성격이 호탕한 산둥성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칭다오부터 본격적인 장거리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당시 중국의 기차는 매우 느렸다. 1박 2일 심지어 2박 3일의 여행도 흔했다. 다음 목적지인 베이징까지 열두어 시간이 걸렸다. 늦은 시간이라 침대칸 기차를 타야 한다. 당시 기차 등급은 앉아서 가는 좌석, 딱딱한 침대 좌석, 푹신한 침대 좌석 순으로 가격이 책정되었다. 우리는 딱딱한 침대 좌석을 구입했다. 외국인은 현지인 가격의 두 배나 세 배를 낸다. 많은 공공서비스가 이중 가격 시스템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외화가 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국경제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외국인 여행객이었다. 예산이 부족한 관계로 최대한 현지인 티켓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물론 티켓창구 앞에서 중국어 연습은 필수다. 매표소 직원은 그냥 우릴 조선족 중국인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첫 열차에서 티켓검표원이 왔을 땐 꽤 긴장하기도 했다. 베이징을 향하는 마음은 굉장히 들떴다. 무려 일주일을 거기서 보낼 예정이다. 둘러볼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베이징의 첫인상은 실망 그 자체였다. 도시가 생각보다 매우 허름하고 공기도 아주 좋지 않았다.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더 많다. 시내버스는 낡았다. 한국에는 없는 버스 두 대를 연결한 아주 긴 버스도 많았다. 바닥은 주로 나무로 되어있는데 중간중간에 틈이 보인다. 그 사이로 매연이 엄청나게 들어왔다. 인상적인 건 버스 운전사의 상당수가 여자였다. 전형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무섭다. 탑승 후 빨리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호통을 친다. 베이징은 평평한 지형이 많아서 자전거 타기가 쉽다. 그래서 짧은 거리는 주로 자전거로 이동했다. 고궁, 이화원, 원명원, 첨단, 근처의 만리장성 등 사진으로만 접하던 유적지를 거의 다 둘러보았다.
고궁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웅장하다. 그럼에도 조각상이나 장식은 매우 정교하다. 황제들은 이곳에서 거의 갇혀 살았다. 그래서인지 고궁을 자금성 (금단의 도시)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그 규모를 보니 갇혀 살 만도 하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부의가 혁명 후 자금성에서 쫓겨나던 장면이 생각난다. 자신의 거세된 그것이 담긴 조그만 항아리를 안고 떠나는 그의 환관들도. 이화원은 아주 아름다운 정원이다. 특히 곤명호라 불리는 인공호수는 짙푸른 물결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출렁인다. 그 신비로움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원명원은 청나라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외세의 침략과 내란으로 폐허가 된 황실의 정원이다. 방문 당시 정부는 폐허의 흔적을 상당 부분 그대로 두었다. 아마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려고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곳을 다시 가보지 않아서 지금은 어떨지 궁금하다.
베이징 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 베이징의 한 대학교 노교수님이다. 북경사범대학교로 기억이 된다. 며칠 동안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얘기를 나누었다. 그를 소개한 사람은 서울에서 나에게 중국어를 가르쳐준 조선족 지인이다. 그들은 서로 친척 관계였다. 교수님은 이미 학교에서 은퇴했다. 연세도 많고 걸음걸이도 불편하였다. 정부에서 제공한 단출한 연립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좀 까칠한 성격의 교수님과는 달리 부인은 친절하고 쾌활했다. 두 분 다 한국어가 유창했다. 습관적으로 말하는 '실없어'란 표현은 좀 어색했지만. 그런데 대학교수로 재직한 것 치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교수 시절에 받았던 월급이 너무 적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 돈으로 몇만 원 수준으로 기억된다. 의사나 다른 공무원도 별반 차이가 없다고 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가져온 문제 중 하나가 여기서 싹트고 있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규모가 큰 사기업에선 그동안 급여가 천정부지로 뛰었지만 공무원이나 공기업은 그러지 못했다. 대도시의 높은 집값과 물가상승을 고려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그래서 공직자들의 부패가 끊임없다. 심지어 큰 공공기관의 수장들을 부패 혐의로 사형에 처하기도 한다. '큰 호랑이'로 불리는 그들은 시범게이스인 것이다.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 정책을 펼치면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흰고양이는 너무 비만하고 검은 고양이는 영양실조 상태이다.
교수님이 선물로 드린 가죽장갑을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대화 중에 한국에 가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넌지시 비추곤 했다. 당시 중국인이 외국을 방문하려면 방문지에서 누군가가 그들은 초대해야만 가능했다. 나는 교수님을 서울로 한번 모셨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고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귀국 후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삶은 바쁜 일상으로 몰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