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맨들을 향한 노자의 경고
중국 도시 가운데 역사적 낭만이 가장 많이 서려 있는 곳은 시안(서안)이다. 옛날에는 장안이라고 불렀다. 중국 고전을 많이 접해본 사람들은 뤄양(낙양)과 더불어 가장 많이 들어봤을 지명이다. 이곳은 많은 중국의 왕조들이 도읍한 곳이다.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를 포함하여 군소 왕조들까지. 장안은 수도의 대명사로도 오랫동안 쓰였던 단어이기도 하다. 당나라 시대의 장안거리는 세계 최대였다. 전 세계의 인재와 물자가 몰려들던 국제도시였다. 기록에 의하면 색목인(서역인 혹은 서양인)도 장안에 상당이 많이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도시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당나라의 도성 성벽이다. 굉장히 높고 웅장하다. 길이도 13km로 현존하는 성벽 중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 첫 번째는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성벽 그리고 세 번째는 대한민국의 한양도성이다.
시안의 낭만의 정점은 당나라 황제 현종과 그의 후궁 양귀비의 로맨스다. 화청지로 대표되는 양귀비의 유적지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그녀는 살아서는 황제로부터, 죽어서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현종은 통치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태평성대를 이끌었다. 이것이 당나라로선 마지막 전성기였다. 운명의 장난인지 현종은 천생연분 양귀비를 만난 이후 인생의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그의 제국도 함께 수렁에 빠진다. 그는 양귀비에 정신을 뺏겨 국정을 멀리하고 그녀의 친인척의 전횡에 눈감는다. 국가는 혼란에 빠지고 민심은 흉흉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뒤엎을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군이 장안 근처까지 밀려오자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도피한다. 피난길이 점점 힘들어지자 지친 황제의 호위병들은 비난의 화살을 양귀비에 돌린다. 그리고 황제에게 그녀의 목을 요구한다. 이에 양귀비는 자결하고 그들의 로맨스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반란이 끝난 후 현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와 양귀비를 그리워하다 얼마 후 세상을 떠난다. 영원할 것 같았던 대제국 당나라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백여 년 후에 막을 내린다. 그리고 600여 년의 세월이 흘러 한반도에서도 비슷한 궁중 로맨스가 펼쳐졌다. 고려시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이야기이다. 이 스토리에선 노국공주는 완전히 무죄이다. 그녀가 세상을 뜬 후 정신줄을 놓아버린 공민왕이 문제였다. 당나라의 현종처럼 그도 초기엔 선정을 베푼 왕이었다. 하지만 노국공주 사후 공민왕은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국정을 망친다. 이로서 고려는 돌아올 수 없는 망국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또다시 천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도 어느 곳엔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선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시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진시황릉과 병마용이 있다. 진시황릉은 그냥 언덕이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정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한때 이 무덤의 진위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다행히 많은 양의 수은이 지하에 있는 걸로 관측된다고 한다. 이곳이 진시황의 무덤일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덤 안에는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수은 마니아였다. 그는 살아생전 영원히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사투 끝에 이룬 천하통일을 오래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 꿈을 위해 수은이 첨가된 보약을 많이 복용했다. 그는 이것이 장수를 보장할 것이라 믿었다. 당연히 수은중독은 그의 명을 재촉했다.
진시황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암살의 위기를 겪었다. 천하통일 후에도 항상 악몽에 시달렸다. 그래서 사후에도 자신을 지켜줄 병마용이 필요했을 것이다. 토기 병사들은 대부분 키가 180cm 이상이다. 당연히 당시의 병사들보다 훨씬 크다. 생김새도 다 제각각이다. 얼굴은 병사들의 실제 모습을 모델로 했을 수도 있겠다. 진시황은 고생 끝에 통일을 이뤘지만 통일 후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1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지방 순찰 도중에 길 위에서 운명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동행하던 그의 신하와 환관들은 당황한다. 승계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성에 도착할 때까지 황제의 죽음을 숨긴다. 시신의 냄새를 은폐하기 위해 절인 생선과 함께 운반했다. 정말로 비참한 황제의 저승길이었다. 도성에 도착한 간신들은 승계를 조작하고 이는 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진나라는 진시황 사후 불과 4년 만에 막을 내린다.
진시황의 통치 방식은 제자백가 사상 중 법가에 가깝다. 국가조직을 중앙집권화하고 법령과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리고 가혹한 사상 통제를 한다. 수많은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박해한다. 진시황의 트레이드마크인 분서갱유이다. 황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대규모 국책사업도 벌였다. 아방궁과 만리장성이다. 하지만 이런 철권통치는 그가 죽자 바로 무너졌다.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제자백가 사상 중에 법가 사상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 도가이다. 장자와 함께 도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통치는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라. 진시황이 노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진나라는 좀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수많은 중국의 왕조들 가운데 가장 오래 존속한 것은 주나라이다. 무려 800년을 지속했다. 중국 왕조의 평균수명이 200년 정도니 네 배나 장수한 셈이다. 역설적으로 주나라의 통치 체제는 봉건제였다. 강력한 중앙집권인 진나라와 정반대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가장 장수했고 진나라는 가장 단명했다. 강한 자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오래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스트롱맨이 너무 많다. 아니 스트롱맨이 되고자 하는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그들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이 진시황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말이다. 이것이 역사가 그들에게 던지는 엄숙한 경고이다.
진시황릉의 발굴은 아직도 계획이 없다고 한다. 더 뛰어난 발굴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진시황은 사후에 어떠한 모습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 했을까 궁금하다. 언젠가 그 비밀이 열리면 꼭 다시 가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