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 시간이 멈춘 토스카나의 보석
3월의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다. 중세의 담장 속에 모든 것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관광 시즌이 아니어서 거리도 한산하다. 사람 대신 도시가 드러나는 계절이다. 아침엔 날씨가 아직 제법 쌀쌀하다. 하지만 콧끝에 스치는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좁은 돌길, 오랜 건물, 이들을 감싼 성벽. 지금이 21세기인지 중세인지 헷갈린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조그만 계곡들이 있다. 거기엔 푸른 목초지와 나무들로 가득하다. 이곳은 오래전엔 로마인들과 중세인들의 농경지였으리라. 여기는 2500년의 역사가 서려 있는 이탈리아의 소도시 시에나이다.
시에나의 시작은 에트루리아부터이다. 신비함을 간직한 이 민족은 이탈리아반도 중간지점인 투스카니 전역과 라지오와 움브리아의 일부 지역에 걸쳐 번성했다. 투스카니라는 명칭도 이들로부터 나왔다. 이탈리아어로는 토스카나라 부른다. 이탈리아어의 조상 격인 라틴어는 투스카니 사람을 남녀 각각 트루스쿠스와 트루스카로 불렀다. 이들은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로마에 흡수되기까지 자체의 문명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의 흔적은 주로 무덤, 벽화, 도자기, 유골함 등에 남겨져있다. 불행히도 문자로 남겨진 기록은 많지 않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문자는 주변국과는 달리 인도유럽어 계통이 아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기록들도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시에나란 이름에 대해선 몇 가지의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다소 전설의 향기가 느껴진다. 고대 로마를 건국한 이는 널리 알려진 대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들은 어려서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로마를 건립한 후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인다. 이때 레무스의 두 아들이 도망가서 세운 도시가 시에나이다. 이 대목은 고구려를 떠나 백제를 세운 온조와 비류의 스토리와 닮았다. 레무스의 두 아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세니우스이다. 시에나가 이 이름에서 나왔다는 가설이다. 재밌게도 시에나를 상징하는 형상은 늑대의 젖을 먹고 있는 쌍둥이다. 로마와 똑같다. 레무스의 두 아들이 로마에서 시에나로 올 때 이 형상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전설이란 언제나 황당하면서도 그럴싸하다. 두 번째 가설은 에트루리아의 한 유력 가문인 사이나에서 시에나가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 가문은 실제 존재했으므로 전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에나를 극적으로 미화하기에는 좀 부족한 서사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시에나가 이 지역의 강의 이름 세나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이것은 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이 강은 시에나에서 존재감이 희미한 까닭이다. 이들 세가지 가설중에서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첫번째를 믿고 싶어 할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박물관에 가면 시에나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도시의 모형을 전시해 놓았다. 에트루리아와 로마 시대의 도심은 그리 크지 않다. 주로 세 개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지금 시가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로마 시대엔 소규모의 군사시설을 갖춘 식민도시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중앙의 직접적인 통치는 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도시는 중세 시대에 이르러 크게 성장하게 된다. 정치체제도 꽤 이른 시기인 12세기에 시에나 공화국으로 전환된다. 물론 현대의 민주공화국 체제는 아니다. 유력 가문들이 집단적으로 도시를 통치했다. 당시 시에나는 투스카니지역의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로 커간다. 14세기 초반에 이르러서는 인구가 5만 명에 달했다. 지금의 시인구가 5만을 조금 넘으니 당시 기준으로는 대도시였다. 그러나 도시의 성장은 곧 정점을 지난다. 14세기 중반에 흑사병이 덮쳤기 때문이다. 이때 공화국의 인구는 반토막이 났다.
투스카니의 핵심 도시인 플로렌스는 시에나의 라이벌이었다. 이탈리아어로는 피렌체라 불린다. 투스카니 지역은 상당히 부유했지만 두명의 주인을 섬기긴 너무 작았다. 수 세기에 걸쳐 두 도시는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리고 군사적 대결도 벌였다. 16세기 중반 무렵에는 무려 7년간을 싸운다. 공화국의 운명을 건 사투였다. 마지막 전투에서 플로렌스는 스페인과 연합하여 시에나를 물리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그리고 시에나 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그 뒤로 시에나는 유럽의 대가문 메디치가 이끄는 플로렌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박물관엔 시에나의 패배의 날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제목이 '시에나 자유의 마지막 날'이다. 거기엔 낙담한 두 명의 병사, 죽은 아들을 맥없이 바라보는 여인, 성모마리아에게 간구하는 여인들이 나온다. 이들은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에나는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다.
시에나 사람들은 전통을 무척 사랑한다. 여느 오랜 유럽의 도시처럼 도시 가운데에 큰 광장이 있다. 피아짜 델 캄포라 불린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경마대회인 팔리오는 시에나의 가장 큰 자랑이다. 근 800년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경마대회는 옛날 유럽에선 흔한 이벤트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 도시에서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중에서도 시에나의 팔리오가 단연 최고다. 독보적으로 오랜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경기는 콘트라다로 불리는 동네들 사이의 경쟁이다. 콘트라다는 공식적인 행정구역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콘트라다에 자발적으로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콘트라다에 대해 대단한 애정을 가진다.
내가 2주 동안 묵었던 하숙집의 할머니는 키오춀라로 불리는 콘트라다에 속해있다. 우리말로는 달팽이를 뜻한다. 경마팀 이름치고는 좀 독특하다. 덕분에 반강제적으로 키오춀라의 클럽과 교회에 가보게 되었다. 거기에 전시되어 있는 내용물들은 생각보다 다채롭고 흥미롭다. 키오춀라 팀의 수백 년의 흔적이 그림, 유니폼, 깃발, 도구 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온통 노랑과 빨강의 물결이다. 간접적으로나마 경기장의 열기를 체험할 수 있다. 키오춀라 외에도 시에나에는 16개의 콘트라다가 있다. 그들도 자신의 클럽과 교회를 통해 오랜 팔리오의 유산을 후세에 전하고 있을 것이다. 팔리오 마니아라면 아마도 이들 모두를 방문할 것이다. 불행히도 팔리오는 매년 6월과 8월 단 두 번만 열린다. 다음 기회를 기약할 수밖에 없다.
팔리오에 대한 행운은 없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횡재가 있다. 주말에 레 스트라데 비안케라고 불리는 사이클링 대회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직역하면 ‘하얀 길들’이다. 선수들이 일반도로뿐 아니라 비포장도로도 달리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놀랍게도 이 대회는 국제대회이다. 고작 인구 5만의 도시가 세계적인 사이클링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선수들은 아름다운 투스카니의 언덕을 배경으로 200km 정도를 달린다. 물론 경주 도중에 그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관객들에겐 한 폭의 수채화를 선사한다. 결승점은 도심 광장인 피아짜 델 캄포다. 대회 날 중심부의 거리는 길 양쪽으로 바리케이드가 쫙 깔렸다. 원래도 좁은 거리인지라 바리케이드와 건물 사이엔 겨우 한사람 지나기에 족하다. 가는 곳마다 엄청난 인파다. 관광 비수기임을 고려하면 시의 모든 인구가 쏟아져 나온 듯하다. 거기에다 미디어와 경찰들로 거리는 더욱 북적인다. 결승점인 피아짜 델 캄포도 관중들로 꽉 찼다. 상상해 본다. 팔리오의 날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단지 자전거 대신 말들이 주인공이다. 이번 대회에는 슬로베니아 선수가 이겼다. 도중에 극적인 드라마도 있어 더욱 얘깃거리가 풍성했다. 이 챔피언은 길에서 한차례 미끄러져 경로를 이탈했다. 그럼에도 그는 극적으로 컴백한 것이다. 2위와 3위는 영국과 벨기에 선수들이 차지했다. 관중들은 국적 상관없이 모두에게 환호했다. '유럽은 하나'라는 유럽연합 EU의 구호가 실감 나는 순간이다.
유네스코 역사 유적지인 시에나의 도심은 두오모 디 시에나와 피아짜 델 캄포로 대표된다. 두오모 디 시에나는 그냥 시에나 성당으로 통한다. 나에겐 유럽에서 본 많은 성당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이다. 일단 성당의 외형은 정갈하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 처럼 압도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아주 화려하지도 않다. 적당한 크기에 깔끔한 외관이다. 주로 고딕과 로마네스크가 섞인 건축양식으로 본다. 흰색 바탕에 약간 초록색을 띤 듯한 검은색의 줄무늬가 외벽과 타워를 두르고 있다. 장엄한 대성당의 위용보단 쉬크한 느낌을 준다. 아쉬운 점은 정면과 측면에서 바라볼 때 높은 타워가 돔의 일부를 가리는 것이다. 그래도 실망하긴 이르다. 맞은편 언덕엔 산 도메니코 교회가 있다. 그곳에서 보면 시에나 성당의 돔과 타워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외형과는 달리 성당 내부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푸르스름한 검은색의 줄무늬가 흰 대리석을 배경으로 기둥과 벽을 둘러싼다. 정면과 돔에 위치한 동그란 창은 구원의 빛처럼 내부를 비춘다. 성당의 바닥은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모자이크로 장식한 대리석 바닥이다. 문양, 서체, 색상 모두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입구 근처의 둥근 문양에는 이탈리아의 도시와 그들의 상징 동물이 새겨져 있다. 플로렌스, 로마, 피사, 루카, 페루자 등이 보인다. 물론 한가운데는 시에나가 자리한다. 자랑스러운 늑대와 쌍둥이 문양과 함께. 여기선 시에나가 세상의 중심이다!
패키지티켓을 끊으면 성당의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는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꼭대기에 서면 성인들의 조각상이 가까이 다가온다. 아래에서는 까마득하게 보였던 것들이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바닥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다른 성당에선 누리기 힘든 대단한 시각적 호강이다. 성당 내부의 벽에는 당대의 뛰어난 화가들의 성화가 걸려있다. 하나하나가 모두 걸작품이다. 그리고 벽 한쪽에는 리브레리아 피콜로미니라 불리는 방이 있다. 이곳의 프레스코는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시에나 성당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완벽해 보이는 외형과 내부에도 불구하고 성당은 미완성이다. 원래의 계획은 라이벌인 플로렌스의 성당보다 더 크게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흑사병이 발생했다. 도시는 일순간에 멈춰 섰고 건축의 모멘텀은 사라져 버렸다.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오른편은 벽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원래는 이곳이 성당의 중심으로 예정되었다고 한다. 계획대로 됐더라면 성당은 지금보다 훨씬 웅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도 충분하다.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처럼 끝내진 못했지만 여전히 걸작이다.
개인적으로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박물관을 좋아한다. 이틀 연속으로 방문했다. 일단 구조가 독특하다. 언덕진 곳에 만들어 앞에서 보면 2~3층 정도로 보이나 뒤에서보면 4~5층 정도로 높다. 박물관의 아래층들은 언덕 아래를 파서 만들었다. 그래서 동굴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건물은 약 천 년 전에 병원으로 세워져 얼마 전까지도 사용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중 하나인 셈이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때에도 많은 환자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병원은 약 30년 전에 박물관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인지 여타 박물관과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동굴 곳곳에 전시품을 늘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박물관은 프레스코로 유명하다. 1층에 펠리그리나이오라는 홀에 있다. 벽 양쪽으로 여덟 개의 프레스코가 쭉 나열되어 있다. 대단한 장관이다. 여기서 당시의 사회상과 자선활동을 엿볼 수 있다. 고아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눠주고, 환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장례하고, 순례자를 환대하는 모습들이 나온다. 1440년대에 그려진 것들이다. 건물, 의복, 표정 등의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다. 좀 이른 시기임에도 르네상스의 영향이 많이 반영된 걸작이다. 아래층에는 조그만 예배당이 나온다. 마치 동굴 속에서 예배보는 느낌을 준다. 어둡고 조금은 음산하지만 아주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여기에 명물이 하나 있다. 사람의 해골이 하나 전시되어 있는데 그 위에 유명한 문구가 있다. "Come tu sei fui ancor io. Come io sono sarai tu ancor". 해석하면 "나는 이전에 지금의 너 같았다, 너도 나중에 지금의 나처럼 될 것이다." 해골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너도 나처럼 죽는다'이다. 모멘토 모리!
더 아래로 내려가면 에트루리아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무덤에서 나온 것들이다. 에트루리아에는 화장의 문화가 있었다. 그래서 망자의 생전 모습을 새긴 유골함 석상이 많이 전해진다. 길게 늘어선 석상에는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비스듬히 앉아 정면을 주시한다. 여길 지나가면 아주 기묘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길에 쭉 앉은 채 지나치는 행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단 그들은 2500년 전 사람들이다! 때마침 다른 관람객도 없다. 동굴 특유의 스산함과 어우러져 오싹한 기운이 감돈다. 그들의 표정은 대부분 담담하다. 가끔 웃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다. 화내거나 찡그린 모습은 없어 보인다. 귀족들이었던 이들은 생전에 비옥한 투스카니에서 풍족한 삶을 누렸을 것이다. 물론 정복자 로마인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지금 그들의 후손은 로마의 후손과 더불어 평범한 이탈리아인으로 이 땅에 살고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진심이다. 그들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이탈리아인 앞에서는 파스타를 요리하면 안 된다. 음식으로 그들을 쉽게 화나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 피자에 토마토케첩을 뿌려 먹는 것이다. 또는 파인애플이 들어간 하와이안 피자를 시키면 된다. 이런 행동은 이탈리아인에겐 테러 행위에 준한다. 커피에 대한 부심 또한 세계적이다. 그럴 만도 하다.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마키아토, 카페라테 등.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작품이다. 물론 아메리카노도 빼놓을 순 없다. 다만 이것은 차원이 좀 다르다. 경멸적인 어감이다. 세계대전 후 점령자 미군이 '신성한' 에스프레소에 감히 물을 타서 마신 것이다. 어쩌면 이들 미군은 무죄였을 수도 있다. 그들에겐 에스프레소가 너무 진했을 것이다. 아니면 에스프레소를 더 오래 음미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 음료는 '아아'이다. 아메리카노도 모자라서 얼음까지 얹었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실로 궁금하다. 뭐니 뭐니 해도 식후에 한잔하는 시에나의 에스프레소가 최고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먹는다. 고급 레스토랑뿐 아니라 보통의 식당에서도 네 가지 코스 메뉴가 보통이다. 먼저 전채인 안티파스티로 시작한다. 시에나에는 닭의 간으로 만든 검은 소스를 빵에 올려 먹는 크로스티니 네리가 유명하다. 두 번째는 파스타 위주의 탄수화물이 주종인 프리미 피아티이다. 이탈리아에는 300종류가 넘는 파스타 요리가 있다고 한다. 지역마다 특색있는 파스타와 소스가 있다. 시에나는 두툼한 면인 피치 파스타가 유명하다. 소스는 멧돼지로 만든 칭기알리 라구와 투스카니의 마늘과 토마토로 만든 알리오네가 대표적이다. 세 번째 코스는 주로 육류와 어류로 만드는 세콘디 피아티이다. 시에나에는 멧돼지 스튜, 돼지구이, 토끼요리가 유명하다. 재밌게도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도 인기가 많다. 직역하면 플로렌스 스타일의 비프스테이크이다. 라이벌 도시의 이름을 딴 요리이다. 우리로 치면 일본식 불고기쯤 되겠다.
마지막 코스는 과자, 케이크, 젤라토를 커피와 먹는 돌치이다. 한마디로 후식이다. 티라미수의 명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젤라토는 세상 최고의 아이스크림이다. 진심이다! 모든 식사에는 빵은 기본적으로 제공한다. 정식 코스대로 다 먹으려면 대식가라야 한다. 나에겐 빵과 안티파스티와 프리미 피아티까지가 한계이다. 그 이상은 고문의 단계이다. 다행히 아침은 정말 간단하다. 커피와 조그만 쿠키나 빵조각이 전부이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리 비만해 보이진 않는다. 국민 평균적으로 꽤 장수국가이기도 하다. 하숙집 할머니는 저녁때 세콘디 피아티도 준비한다. 먹는 속도가 떨어지면 왜 이리 못 먹느냐고 핀잔도 준다. 그리고 그녀는 저녁 식사마다 와인을 곁들인다. 투스카니의 대표 산물인 키안티 와인이다. 키안티는 시에나, 플로렌스, 아레초 등의 도시와 주변의 시골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와인산지다. 여기선 와이너리나 시골농장에서 며칠을 보내는 여행코스가 인기가 많다.
투스카니의 다른 자랑거리는 언어이다. 이곳의 사투리가 이탈리아의 표준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수도인 로마의 사투리가 아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이탈리아에는 약 150년 전까진 표준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수십 개의 지역 사투리만 있었다. 이탈리아의 통일과 더불어 표준어가 지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TV나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지역 사투리도 많이 썼다고 한다. 투스카니의 말이 표준어가 된 것은 문학가의 역할이 컸다. 거장 단테, 페트라르카, 보카치오가 이곳 출신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중심은 단연 플로렌스였다. 자연히 이곳에서 문학과 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리고 거장들은 그들의 작품을 통해 이 지역의 언어를 보편화시켰다. 단테와 보카치오는 이탈리아의 세종대왕인 셈이다.
이탈리아어는 매우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어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꼽는다. 나도 동의한다. 대부분의 단어가 모음으로 끝나 소리가 예쁘고 음악적이다. 많은 오페라의 가사가 이탈리아어로 쓰인 이유이다. 발음은 한국인에게 적응하기 수월하다. 한국어처럼 모든 음을 발음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어는 말하는 리듬이 시간 단위로 설정되어 있다. 각 리듬이 2단어로 되어있든 4단어로 되어있든 동일 시간 내에 내뱉어야 한다. 자연히 연음과 압축된 발음이 많다. 우리가 영어를 오랫동안 배워도 듣고 말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이탈리아어의 문법은 제법 복잡하다. 라틴어 계열의 언어들이 대체로 그렇다. 다행히 좋은 점도 있다. 이들의 문법이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단어의 유사성도 매우 높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80% 이상의 단어가 유사성을 가진다. 포르투갈어와 스페인어는 90%에 가깝다. 프랑스어도 다른 라틴어계 언어와 70~80% 정도의 단어 유사성을 가진다. 그래서 이들 언어 중 하나를 제대로 익히면 다른 한두 개는 쉽게 배울 수가 있다. 유럽에 외국어 몇 개씩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이다. 유럽 국가들이 EU라는 울타리 안에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는 언어의 역할도 클 것이다.